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112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계절/김나영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계절 김나영 <24시 편의점> 붙박이 탁자 한 켠 한 노숙자가 복권을 긁는다 요긴한 도구처럼 상반신을 삐뚜름히 구부리고 긁고 또 긁는다 다른 동작이 끼어들 틈이 없다 빵이나 소주대신 복권을 사서 긁는 저 노숙자는 한방에 삶이 복권되기를 꿈꾸고 있거나 아.. 2012. 11. 8. 내 안에 구룡포 있다/김윤배 「내 안에 구룡포 있다」 김윤배 갯바람보다 먼저 구룡포의 너울이 밀려왔다 너울 위에 춤추던 열엿새 달빛이 방 안 가득 고인다 밤은 검은 바다를 벗어놓고 내항을 건너고 있었다 적산가옥 낡은 골목을 지나 밤은 꿈을 건지는 그물을 들고 있다 너는 구룡포였으니 와락 껴안아.. 2012. 10. 25. 佳人解裙聲 가인 해군성 佳人解裙聲 가인 해군성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裙 군 (치마)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소리 조선, 宣祖 선조 임금 때 우연히 어느 누구의 환송 잔치에 참석한 鄭澈 柳成龍 李恒福 沈喜壽와 李廷龜 등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다섯 대신들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 2012. 10. 15. 편지/김남조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 2012. 10. 1. 노루목/한승오 한승오, 「노루목」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발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은 저.. 2012. 9. 24. 푸르른 날/서정주 http://letter.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14&OrgView=yes&pID=18 서정주,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 2012. 9. 18. 내가 돌아설 때/문태준 내가 돌아설 때 문태준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뗀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 2012. 9. 16. 김씨/임희구 「김씨」 임희구 쌀을 씻어 안치는데 어머니가 안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나는, 김씨! 하고 부른다 사람들이 들으면 저런 싸가지 할 것이다 화장실에서 어머니가 어! 하신다 나는 빤히 알면서 뭐해? 하고 묻는다 어머니가 어, 그냥 앉아 있어 왜? 하신다.. 2012. 8. 9. 행복/헬만 헷세 행복 헬만 헷세 행복을 쫓고있는 한 넌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하다, 비록 가장 사랑하는 것 모두 네가 가졌을 지라도. 잃어버린 것들을 애석해하고 목적에 집착하여 안달하는 한 결코 평안의 참뜻을 모르리라. 모든 소망을 단념하고 목적도, 아집도 잊어버린 채 행복 따위를 말.. 2012. 8. 9. 이전 1 ··· 6 7 8 9 10 11 12 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