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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112

혼자 밥을 먹는 저녁/권현형 혼자 밥을 먹는 저녁 권현형 기차가 남쪽으로 몸을 틀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머무는 역마다 낯설다 혼자 밥을 먹는 저녁 휙휙 지나가는 기차의 속도와 상관없이 목울대를 넘어 음식물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혼자 여행은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에 간극을 만든다 간격을 떼어 놓는다. 가장 멀리 놓이는 것은 나 자신 먼 곳에 놓여 창 밖 눈발을 바라보다 혼자 떠나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나를 누가 기억하고 증명해 줄 것인가 눈발이 창에 부딪히며 만든 수액 위에 지문을 남겨본다, 첫눈의 데칼코마니 눈 앞으로 몰려오는 흰 흰 흰나비떼 누가 저 빙의의 날갯짓을 기억할 것인가 ********************************************************** 혼자라서 좋고 혼자라서 적막한 그.. 2023. 12. 19.
수연산방에서/ 고두현 수연산방에서 - 《무서록》을 읽다 고두현 문항루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삼 면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본다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이다 해 저문뒤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달빛은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가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 슨 상관 있으랴 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에 앉은 동산도 두 팔 감았다 풀었다 밤새도록 사이좋게 노니는데 시작 끝 따로 없는 열두 폭 병풍처럼 우리 삶의 높낮이나 살고 죽는 것 또한 그렇게 순서 없이 읽는 사람이 먼 훗날 또 있으리라 ********************************************** 생과 사에 순서가 있으면 좋겠다 여기 왔던 차례대로 여기를 떠난다면 슬픔도 .. 2023. 12. 18.
시간을 요리하다/고정애 시간을 요리하다 고정애 시계는 국수 틀이다 재깍재깍 국수를 밀어낸다 길게 밀려나온 국수를 날선 칼로 길게 또는 짧게 끊어내어 요리를 한다 중국식? 일본식? 한국식? 비빔이건 국물이건 문제는 소스 종류다 소스따라 향과 맛이 달라지는 시간의 국수 그때그때 생각이 나는 대로 입에 맞게 공들여 만들면서 사랑하는 너와 나 함께 먹는다면? 즐거운 국수를, 아니 맛있는 시간을, 요리하며...... *********************************************************** 365일 정해진 1년이라는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국수틀에서 국수를 뽑듯이 입맛에 맞는 시간들이었는지 생각해보는 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공들여 만들어 가는 시간을 남기시기를 바라면서...... 2023. 12. 17.
즐거운 한때/고영 2023.12.15. 즐거운 한때 고영 창을 두드리는 장대비가 방안 구석구석 빗소리를 남기고 갑니다 몸만 풀고 가기엔 아무래도 섭섭했던 모양이군요 책 속에도 빗소리로 가득합니다 저 떡갈나무 장대비가 숲을 건너가기 전에 나는 빗소리를 담아 두려 했습니다 빗방울을 움켜쥐고 있는 도토리들 도토리를 쏘아 올리는 흥겨운 떡갈나무들 숲속에 펼쳐진 저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끝이 들려, 마음이 들려 어느새 신명난 구결꾼이 되고 맙니다 징소리가 된 빗소리 꽹과리가 된 떡갈나무 숲속 옹이투성이 나무의 잎도 빗소리에 긁히니 한가락 노래가 되는군요 한바탕 잔치가 질퍽한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밤은 빗소리를 떠나보내긴 글렀나 봅니다 어린 나무들까지 저렇듯 모여 앉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 ***********.. 2023. 12. 15.
가보지 않은 곳/강인한 2023.12.14. 가보지 않은 곳 강인한 길 솟은 억새와 쑥 덤불이 웃자란 곳 몇 걸음 아닌데도 나는 늘 거기까지는 가보지 않았다 금연 구역의 경계를 벗어난 몇 발짝에서 멈춰 우산을 들고 바라보면 빗속의 능선들이 적막해서 아름다웠다 비안개가 북에서 남으로, 비구름이 서에서 동으로 골짜기를 파고들며 애태우고 있었다 내가 피우는 담배연기는 맛있게 우산의 경계를 빠져나와 굵어진 빗줄기에 소스라쳐 사라져 버리고 저 여름철의 헛것들이 시들고 쓰러져서 제 스스로를 거둔 다음에야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등성이로 올라서지 못한 산 발치에 낙엽을 다 떨군 교목 한 그루가 여름내 우듬지에 숨겨둔 까치집을 내보일 때 저쪽에 대여섯 채의 지붕이 떠 올랐다 맨 앞에 마중 나온 그 집의 문간에는 오래된 .. 2023. 12. 14.
전보/문정희 전보 문정희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2020. 9. 5.
터키석 반지/문정희 터키석 반지 문정희 사랑에 은퇴하고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 지면 터키석 반지 사러 터키에 가고 싶다 어느 슬픔의 바다에서 건져올렸던가 천년 햇살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눈을 가진 여자 푸른 물소리 출렁이는 터키석 속에서 만나고 싶다 비둘기 떼 쏟아지는 위스크다르 항구에 닿고 싶다 실크로드 그 끝자락에는 동양과 서양의 온갖 보석들이 짧은 지상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겠지 흙에도 귀가 달린 나라 터키에 가서 내가 나를 위해 터키석 반지 하나 사고 싶다 사랑에 은퇴하고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면 2020. 9. 3.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 2020. 2. 22.
아침/정현종 아침 정현종 아침에는 운명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정현종 시선집, 섬, 문학판 2020.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