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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112

꽃들/문태준 꽃들 문 태 준 모스끄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 2012. 3. 17.
이 사진 앞에서 이승하, 「이 사진 앞에서」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 2012. 3. 12.
등잔 등잔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었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 2012. 2. 13.
월훈/박용래 「월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 2011. 12. 12.
소통疏通 소통疏通 황 여 정 비오는 날 비와 풀들과의 관계처럼 세상을 만나고 싶어라 팍팍하게 더딘 날 거칠어진 이파리며 속대궁 좋아라 웃는 소리 들리듯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있음으로 만나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용이 되는 비오는 날 비와 풀들과의 관계처.. 2011. 11. 3.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 2011. 10. 18.
명시 명시 배한봉 꽃시장 상점마다 백합 수선화 아네모네… 둥근 알들이 한 자루씩 붓을 힘차게 뽑아 들고 있다 봄에 대한 명시를 쓰려는 것이다 모필(毛筆)의 반쯤 열린 분홍 입 속에서 은밀하게 성숙되는 꽃의 시 한 번만 읽어도 감동 잊히지 않는 새 어법의 향긋한 시행들이 겨울 새벽의 미.. 2011. 10. 18.
가시나무새 / 조성모 가시나무새 / 조성모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 2011. 10. 18.
낯선 곳/고은 낯선 곳 고은 떠나라 낯선 곳으로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 단 한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으로부터 그대 떠나라 아기가 만들어 낸 말의 새로움으로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그리하여 할머니조차 새로움이 되는 곳 그 낯선 곳.. 2011.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