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배한봉 꽃시장 상점마다 백합 수선화 아네모네… 둥근 알들이 한 자루씩 붓을 힘차게 뽑아 들고 있다 봄에 대한 명시를 쓰려는 것이다 모필(毛筆)의 반쯤 열린 분홍 입 속에서 은밀하게 성숙되는 꽃의 시 한 번만 읽어도 감동 잊히지 않는 새 어법의 향긋한 시행들이 겨울 새벽의 미농지 위에 노랗게 또는 발갛게 처음이라 더 달큰한 꽃 몸살로 기록되고 있다.
한 자루 붓을 뽑아낸 알의 힘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다 기다림이라는 붓 끝에서 개화하는 신생의 목록은 아기 심장처럼 두근거리고 있다 비루한 시간들을 견디게 한 꽃이라는 불이 켜지고 죽음보다 힘센 절망의 그림자를 덜어내는 그 불빛만큼 당신을 기다려온 사람도 환하게 켜진다.
나는 지금 꽃의 시가 그리움의 세포와 세포 사이에 맑은 종소리로 채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종소리를 기억하는 한 겨울을 건너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의 문장은 꽃샘의 질투 때문에 더 아름답고 우리 걸어가야 할 길은 그 문장으로 인해 오래 따뜻하고 환하다.
-『시와 표현』(2011,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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