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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by 매화연가 2011. 5. 24.

[제3회 서정시학 작품상 수상작]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황 학 주

<계간「서정시학」2009년 봄호>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
순서가 없는 일이었다
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
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
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였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바다 소금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허가 받지 않은 채 파도소리를 등기했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출입문 낼 허공 옆 수국 심을 허공에게
지분을 떼 주었다

제 안의 어둠에 바짝 붙은 길고 긴 해안선을 타고
다음 항구까지 갈 수 있는 집의 도면이 고립에게서 나왔기에
섬들을 다치지 않게 거실 안으로 들이는 공법은
외로움에게서 배웠다
물 위로 밤이 오가는 시간 내내
지면에 닿지 않고 서성이는 물새들과
파도의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가식으로 정렬된 푸르고 흰 책등이
마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바다 코앞이지만 바다의 일부를 살짝 가려둘 정도로
주인이 바다를 좋아하니
바다도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도록
자연으로 짓는 게 기본

순서를 생각하면 순서가 없고
준비해서 지으려면 준비가 없는
넓고 넓은 바닷가
현관문이 아직 먼데 신발을 벗고

맨발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집,
내 집터는 언제나 당신의 바닷가에 있었다

※ 추천위원
강은교 고봉준 권 온 김문주 김종훈 김지녀 김진희
맹문재 문홍술 방민호 신덕룡 신용목 신해욱 여태천
오형업 유성호 이경수 이근화 이상숙 이숭원 이하석
장석원 전형철 조해옥 진은영 최동호 하재연 함돈균
(이상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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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가장 멀리 가서 가장 잘 어두워지는 그런 곳에서

황 학 주

7년전 고흥 바닷가에 일곱 평짜리 조립식 주택을 짓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설가 김훈이 내려와 보고 남만이라는 옥호를 지어주고 갔습니다. 남녘 남자에 오랑캐 만자를 썼지요. 집이 작고 추례해 오랑캐가 사는 집 같다고 한 것인데, 6년 동안 서울에서 그 집 남만을 들락거리며 살다 재작년에 언덕배기에 새 집을 지었습니다.
오랑캐 살던 집이 지금은 시인의 집이 되었네, 라고 할 만하니 이만하면 출세입니다.
남쪽이나 서쪽 바닷가를 헤맬 때 저는 갯벌 위에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갯벌 위에 인간의 집을 앉힐 수는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동쪽 바닷가를 헤맬 때는 늪지 위에 집을 짓고 싶어서 그런 땅을 늘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집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가 언제나 제겐 중요했습니다. 어떤 집을 지을 것이냐 보다 집을 지으면서 혼자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집을 짓는 고독한 순간이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불가침의 장소성이 더 중요한 문제였지요. 집을 저보다 더 훌륭하게 지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에.
겨우 오랑캐 같은 영혼이 혼자 들어 사는, 누군가와 함께 뒹굴며 나누기에는 아직 부족하기만 한 집에 주신 과한 상이지만 상을 받아서 기쁩니다.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기별을 받았을 때는 막 어두워진 후엿습니다. 그러고는 새벽 네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인이 詩를 써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재주가 있어서 상을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같은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따스하고 예쁜 상에 마냥 수줍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뜨끔한 것도 시인다우라는, 시인 노릇 하라는 꾸지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재주를 감추려고 때론 노력하지 않는 척하면서 열심히 살고, 그렇게 詩도 쓰고 있습니다. 시간이 밀려가고 쓸려가는 것이 느껴지는 불가지한 저녁 무렵, 詩가 무엇인지 詩로 상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다 알 수는 없지만 심사위원들께도 서정시학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큰 힘을 준 벗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용기를 내, 가능하면 멀리 가서 가장 잘 어두워지는 그런 곳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는 詩를 또다시 꿈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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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
낭만주의자의 시선이 별처럼 빛날 때

권 온

이 글은 詩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를 통해 황학주의 詩 세계를 다뤄보고자 한다.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첫 연은 긴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詩의 화자인 '나'와 그가 추구하는 대상인 '집'이 '바다'라는 중심 배경과 함께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 詩가 전달하는 매혹은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부재가 존재론 전환하는 지점과 무관하지 않다. "순서가 없는 일"이나 "집터가 없을 때"는 "내 주머니에 있는 집"으로 이동한다. "설계도를 본 사람"은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드는 창"은 화자 곁에 있다. '없다'의 이면(裏面)에 '있다'가, '부정'의 배면(背面)에 '긍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기본 구도를 낭만적 성격으로 이끈다. 이를 시인의 언어로 요약하자면 "기적"이 될 것이다.
2연에서는 집 짓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이라는 표현을 이야기할 때,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겠다. 독자들은 일차적으로 '심다'나 '개통하다', '등기하다'나 '(지분을) 떼 주다' 등 일련의 동사에서 집을 짓고 소유하는 실제적 행동을 떠올리기 쉽지만, 시인은 이런 단순한 방식을 거부한다. '생각하다'라는 동사가 돌올하게 솟아오르는 지점은 단순한 일상의 평면을 입체적으로 구획한다. 집과 바다, 현실과 사유(상상)의 교차가 이뤄지는 대목에서 이 詩의 특징이 전경화된다. 더불어 '밤'과 '별' 같은 어휘는 낭만주의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을 작품 속에 은은하게 새겨 넣는다.
1연에 등장한 '설계도'가 3연에 이르러 '집의 도면'으로 옷 갈아입을 때, 이 詩을 읽는 이들의 시인에 대한 신뢰감은 증가할 수 있다. 좋은 시인과 평범한 시인, 그저 그런 詩와 기억에 남을 만한 詩를 가르는 기준은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연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시인의 어휘는 '고립'과 '외로움'이다. 삶의 거처인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방법이 고독한 감정의 심연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화자/시인을 에워싼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에 관한 우려로 연결될 수 있지만, 이때 황학주는 다시 한 번 반전을 시도한다. "도서관"과 "개가식"과 "흰 책등"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긴밀히 결속된 단어들이다.
1연에서 3연에 이르는 동안, 독자들은 바다와 인접한 한적한 곳에 집을 짓는 어느 목수의 성실한 모습을 보았다. 이 詩에 등장하는 '목수'와 그가 건축하는 '집'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것이 '바다'와 대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집으로 표상되는 현대인의 인위적 공간에 바다라는 이름의 자연이나 그 주변 사물들이 적절하게 겹쳐지면서 아름다운 화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개성인 셈이다. 4연에서 시인은 이 詩의 큰 틀인 바다와 집의 상호 관계를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평범한 진술인 2행의 "주인이 바다를 좋아하니"와는 달리 3행은 일종의 파격으로 보인다. "바다도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도록"에는 주체와 객체의 역전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4행의 '기본'은 실상 범인(凡人)의 '기본'을 넘어선 시인만의 시안(詩眼)을 보여준다.
황학주의 詩 <어느 목수의 집 짓는 이야기>가 독자들의 감성에 적극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의 결론에 해당하는 5연을 뜯어보면 그에 대한 해답의 일단을 얻을 수 있겠다. '순서'와 '준비'를 대하는 화자/시인의 태도를 보라. 그는 집을 짓는 일이 생을 영위하는 일과 다른 것이 아님을 현시한다. 특히 '(순서가) 없고' 혹은 '(준비가) 없는'의 자세에 주목하고 싶다. 지천명을 넘긴 시인이 바라보는 삶의 격률은 이처럼 유연하고 포괄적이다. '신발'과 '맨발'의 대조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여기 제시된 '맨발'은 2연의 '야생화'와 유사한 역할(낯설고 신선한 날것의)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작품의 전체 구도에서 '바다'로 수렴된다. 이 詩가 읽을 만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지점 중 하나는 시인의 일탕 욕구에서 기인한다. 그런 까닭에 그가 짓고자 하는 집이 '맨발로 들어가는' 집이 아니라 "맨발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집이고, 그의 집터가 '바닷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바닷가"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비중의 구절이 된다. 이 작품의 표제인 '어느 목수의 집 짓는 이야기'는 '어느 시인의 詩 짓는 노래'로 변형될 수 있다. 한 낭만주의자의 개성적 시선이 바닷가의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 권온
• 문학평론가.
• 2008년《문학과사회》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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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
맨발의 목수를 위하여

김 지 녀

우선 詩를 다시 읽어보자.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
순서가 없는 일이었다
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
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
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였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바다 소금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허가 받지 않은 채 파도소리를 등기했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출입문 낼 허공 옆 수국 심을 허공에게
지분을 eP 주었다

제 안의 어둠에 바짝 붙은 길고 긴 해안선을 타고
다음 항구까지 갈 수 있는 집의 도면이 고립에게서 나왔기에
섬들을 다치지 않게 거실 안으로 들이는 공법은
외로움에게서 배웠다
물 위로 밤이 오가는 시간 내내
지면에 닿지 않고 서성이는 물새들과
파도의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가식으로 정렬된 푸르고 흰 책등이
마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바다 코앞이지만 바다의 일부를 살짝 가려둘 정도로
주인이 바다를 좋아하니
바다도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도록
자연으로 짓는 게 기본

순서를 생각하면 순서가 없고
준비해서 지으려면 준비가 없는
넓고 넓은 바닷가
현관문이 아직 먼데 신발을 벗고

맨발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집,
내 집터는 언제나 당신의 바닷가에 있었다

— 황학주,「어느 목수의 집 짓는 이야기」전문.

이 詩를 통해, 지금 나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지어진 집'과 그 집에서 한평생 자고 일어날 것 같은 '어느 목수'를 떠올린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마다 소금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곰곰이 생각을 하는 목수의 그 순한 마음과 맨발의 따뜻함을 느낀다. 이 이야기에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순간 순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사람들의 외로움과 고독을 보듬어주는 넓고 넓은 바다가 있다.
모든 사물을 본래 있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목수는 집을 짓고 있다. 허공에 투명한 못을 박아 지붕과 창문을 만들고 누구나 들어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 목수는 그런 집을 생각하며 오래 살았다. 집터가 없을 때에도, 삶의 요소들이 목수에게 위협을 가할 때에도, 그는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주머니' 속에서, 그의 마음속에서 '기적처럼' 쉬지 않고 짓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묶여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공간(집)을 구축함으로써, 이 詩의 목수는 대자연 앞에서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조급함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듯하다. 이렇게 집을 짓고 그 안에 거주하는 것을 레비나스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레비나스에게 집짓기는 삶의 요소(환경)들로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자기성을 확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집은 도구이지만, 인간의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 조건이자 그 시작인 특별한 위상을 지니게 된다. 누구나 집을 기점으로 모든 대상을 관찰하고 구별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지각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집에 거주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으로의 전향, 곧 자신에게로 돌아옴이며 피난처와 같은 자신 속으로의 은둔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환대(歡待)가 있고, 기대(期待)가 있고, 인간적인 영접(迎接)이 있다.(강영안,「레비나스의 철학—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 136~140쪽 참조.)
그리고 이어서 레비나스는 집이라는 공간의 친밀성이 '다소곳한 타인' 즉 여자의 등장으로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하는 이 타자(여자)의 다소곳함은 이 詩에서 결코 변질되거나 손상될 수 없는 자연의 절대성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러한 절대적인 타자성은 시적 주제와 타자(자연)을 쉽게 동일성의 원리 속에 포함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詩는 주제와 타자가 동일성의 원리 속에 놓이게 될 때, 인간의 모든 외로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이 詩에서 목수가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을 짓는 일은 결과적으로 자연에 가장 가깝게 돌아가는 일과 같은 일이겠으나, 그것은 동시에 자기 내면으로의 복귀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즉 그것은 바다와 같은 따뜻하고 포용적인 공간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그 안에 은둔하고 싶은 목수의 좀 더 깊은 자기인식인 것이다.
이처럼 이 詩는 우리가 잠시 내일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자기만의 집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줄곧 은혜를 베풀어주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자유를 선사해주고 있다.
이것은 목수의 말대로 '순서가 없는 일'이다. 목수가 말하고 있는 순서와 준비는 삶의 요소에 가까울 것이나, 너그러운 혼대와 영접만이 가능한 바닷가에서 그것은 도리어 불필요한 절차에 불과하다. '순서'나 '준비'가 필요 없이 바다에서 '집 한 채가 통째로 드는 창'을 발견하고 마주 대하는 목수의 건축 공법은 지극히 자연의 순리대로 이루어진다. 인위의 순서나 준비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 공법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온 삶의 가장 소중한 순서나 질서에 대해 말해준다.
이 발견은 '제 안의 어둠'에 불을 밝혀 본 자의 몫이며, 고독을 고독으로 완성시키는 영혼의 숭고함이 만들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 김지녀
• 2007년《세계의문학》으로 등단.
• 시집「시소의 감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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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서정시학」2010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