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절망에 대해서」(낭송 황규관)
절망에 대해서
김정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발설의 입도 없고 다만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앞에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두고 차분히 걷지 못한다. 돌아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왜소한 그림자를 삽시간에 삼켜버리고 다시 토해내고, 토해낸 그림자는 갑자기 산더미만해지고 헤드라이트와 내 그림자는 골목 저편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게가 된다 담벼락 끝으로 설설 기어 오르는 헤드라이트는 다만 번쩍거릴 뿐인데 뻔뻔스레 번쩍거릴 뿐인데 헤드라이트의 절망과 내 몸 속, 그립고 또한 아주 왜소한 나의 절망이 그리고 절망의 절망이 일순의 거대한 시대를 지나 골목 저편으로 어둠을 몰고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다만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아무데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안심하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
―시집『지울 수 없는 노래』(창작과비평사, 1982)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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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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