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오, 「노루목」
벼이삭 누렇게 출렁대는 가을. 저 너머 콩잎을 찾아 고라니가 논을 밟고 오간다. 어제 남긴 발자국 그 자리에 또 오늘의 발자국을 남기고. 어제와 똑같은 길을 맹목으로 고집하는 내일의 사람처럼.
발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은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발갛게 석양을 잠재운 지평선이 논 위에 가만히 내려앉은 저녁. 불쑥 고라니 한 마리가 논 속 평화로운 수평을 뚫고 용수철처럼 솟구친다. 길 잃고 허둥대는 발걸음이 벼를 짓밟고 혼란스럽게 산을 향해 달린다. 길 아닌 두려움에 선 인생처럼.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 벼 포기 얼기설기 깔아 만든 하룻밤 잠자리. 야생의 고린내가 훅 다가온다.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저 먼 냄새. 도무지 멀리할 수 없는 이 가까운 냄새. 삶의 도정에 남겨놓은 내 치부처럼.
호기심의 첫걸음이 내딛은 길을 따라 딱딱한 길로 굳어버린 습성. 노루목. 고라니는 이 길을 다시 오리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노루목을 되새김질하는 나의 발걸음처럼.
● 시_ 한승오 - 1960년 부산 출생. 산문집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몸살』, 산문시집(혹은 시적 산문집) 『삼킨 꿈』이 있음. 현재 시골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음.
앞부분은 시각적이고 뒷부분은 후각적이다. 어쩜 이리 생생할까! 『시이튼 동물기』나 『파브르 곤충기』를 읽던 어린 시절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노루목」이 실린 책 『삼킨 꿈』은 전편이 시인의 심성, 시인의 정신, 시인의 발성으로 점철돼 있다. 정영목은 발문에 이리 적었다.
‘H는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응결된 다음에야 일 년에 한 번 쌀 보내주듯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킨 꿈』은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익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뉘 한 톨 찾아보기 힘들게 정제되기까지 한 이 글들이 어떻게 시가 아니란 말인가? 책장에 딱 부러지게 ‘시집’이란 패찰을 달지 않은 것이 불만스럽고, 좀 뒤숭숭하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고라니의 고린내! 재치 있기도 하지.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에서 훅 끼치는 ‘야생의 고린내’라니, 산뜻하기도 하지!
시인과 농부를 한목에 구현하고 있는 한승오의 앞서 낸 책들도 얼른 구해 읽고 싶다.
「노루목」이 실린 책 『삼킨 꿈』은 전편이 시인의 심성, 시인의 정신, 시인의 발성으로 점철돼 있다. 정영목은 발문에 이리 적었다.
‘H는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응결된 다음에야 일 년에 한 번 쌀 보내주듯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삼킨 꿈』은 ‘경험이 쌀알처럼 딴딴하게’ 익은 글들을 묶은 책이다. 뉘 한 톨 찾아보기 힘들게 정제되기까지 한 이 글들이 어떻게 시가 아니란 말인가? 책장에 딱 부러지게 ‘시집’이란 패찰을 달지 않은 것이 불만스럽고, 좀 뒤숭숭하기도 해서 하는 말이다.
고라니의 고린내! 재치 있기도 하지. ‘막 떠난 고라니의 자리’에서 훅 끼치는 ‘야생의 고린내’라니, 산뜻하기도 하지!
시인과 농부를 한목에 구현하고 있는 한승오의 앞서 낸 책들도 얼른 구해 읽고 싶다.
부기: 고라니가 노루였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쁨으로 설레며 국어사전을 뒤져 확인해 봤다. 노루는 수컷에 뿔이 있고, 고라니는 노루와 비슷한데 암수 모두 뿔이 없단다. 고라니와 노루가 같은 동물이 아닌 것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나저나 꼭 한쪽에만 뿔이 있어야 한다면, 고라니가 더 뿔 있을 것 같은 이름 아닌가? ‘노루’가 더 머리통이 매끈할 듯 들리지 않나?
문학집배원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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