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산방에서 - 《무서록》을 읽다
고두현
문항루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삼 면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본다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이다
해 저문뒤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달빛은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가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 슨 상관 있으랴
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에 앉은 동산도 두 팔 감았다 풀었다
밤새도록 사이좋게 노니는데
시작 끝 따로 없는
열두 폭 병풍처럼 우리 삶의 높낮이나
살고 죽는 것 또한 그렇게
순서 없이 읽는 사람이
먼 훗날 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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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에
순서가 있으면
좋겠다
여기 왔던 차례대로
여기를 떠난다면
슬픔도 아픔도
덜 하겠지
눈물이 없는 죽음은 없겠지만
가슴에 대못처럼 아픔을 남기는 죽음은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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