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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가보지 않은 곳/강인한

by 매화연가 2023. 12. 14.

2023.12.14.

 

 

가보지 않은 곳 

 

강인한

 

길 솟은 억새와 쑥 덤불이 웃자란 곳

몇 걸음 아닌데도

나는 늘 거기까지는 가보지 않았다

 

금연 구역의 경계를 벗어난 몇 발짝에서 멈춰

우산을 들고 바라보면

빗속의 능선들이 적막해서 아름다웠다

비안개가 북에서 남으로, 비구름이 서에서 동으로

골짜기를 파고들며 애태우고 있었다

 

내가 피우는 담배연기는 맛있게

우산의 경계를 빠져나와

굵어진 빗줄기에 소스라쳐 사라져 버리고

 

저 여름철의 헛것들이 시들고 쓰러져서

제 스스로를 거둔 다음에야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등성이로 올라서지 못한

산 발치에 낙엽을 다 떨군 교목 한 그루가

여름내 우듬지에 숨겨둔 까치집을 내보일 때

저쪽에 대여섯 채의 지붕이 떠 올랐다

맨 앞에 마중 나온 그 집의 문간에는 

오래된 주소가 아닌지

셀로판지와 검은 리본에 묶여

시든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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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나뭇잎이 깔리고 

길바닥이 겨울비에 촉촉하다

잎을 떨군 나무들의 겨울나기가 시작되는 

고요와 적막으로 가는 

이 계절이 참 좋다

 

동지가 가까워지는 이 시간

칠흑같은 어둠에 나도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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