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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일찍 피는 꽃들/조은

by 매화연가 2016. 4. 6.

조은, 「일찍 피는 꽃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 시_ 조은 – 1960년에 태어나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 『생의 빛살』,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 『낯선 길로 돌아오다』 『또또』, 동화 『햇볕 따뜻한 집』 『다락방의 괴짜들』 『동생』 『옛날처럼 살아 봤어요』 등 많은 책을 펴냈다.

▶ 낭송_ 조윤미 – 배우. 연극 ‘푸르른 날에’, ‘슬픈 인연’ 등에 출연.

 

배달하며

배달하며

삶의 갈래 속, 수렁에서 시인은 잠을 깰 때도 울음소리에 깬다고 했다. 그녀 시속의 낙지들은 몸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된다고 접시 속에서 사방으로 몸으로 기어나간다고도 했다. 이렇게 ‘생의 빛살’에 닿았는가 보다.
산당화를 보다가 현실의 신호등과 제때를 놓치고 그 나무의 기운에 취해 사는 동안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졌다.
돌아 갈수 없는 곳 까지 와버린 기실은 서슴없이 등져버린 수많은 실용과 세속의 것들… 일제히 다 함께 신호등을 따라 걷는 길이 아니라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그 꽃나무 어딘가에서 아직도 홀로 어슬렁거리는 모습!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 음악_ The Film Edge-Reflective-Slow-Tentative
▶ 애니메이션_ 제이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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