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향, 맑고 향기로운 삶의 지혜
황여정
봄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즐거움을 상상하게 된다.
만남의 기쁨에 대한 설렘으로 정작 만났을 때 보다 더
깊은 즐거움을 내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2월이면 남쪽을 향해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어느 사찰에서 오래된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리려나하고
매화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는 사진을 찍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고
매화향기도 맑고 은은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옛날부터 선비들이 매화꽃이 피면 문우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화가들이 한 폭의 그림 소재로 삼았으니 그 고매한 품격을 알고는 있었으나
내가 온전히 내 느낌으로 알기 까지는 최근의 일이었다.
무릇 모든 일들이 아하! 하고 내가 받아들이는 것과 남들이 좋아라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의 블로그를 통해 탐매여행이라는 글을 읽었다.
수령이 100년에서 600년이나 되는 고매화가 어느 사찰 어느 가옥에 있는지도 소개가 되었다.
통도사의 자장매, 선암사의 선암매, 백양사의 고불매, 화엄사의 흑매, 독수정의 독수매, 지실마을의 계당매, 와룡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등 매화마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수령이 몇 백 년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오랜 세월 동안 꽃을 피운다는 사실에 고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꽃이 만개하는 시기는 대략 일주일 정도여서 그 시기를 맞추어서 찾아간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일찍 가면 피지 않아서 아쉽고 늦게 가면 꽃이 떨어지고 향기가 소진해서 아쉽다.
몇 번의 출사 때도 그 절정의 순간을 놓치고 말았지만 어느 해 봄날
정말 아주 만개한 화엄사의 흑매와 백양사의 고불매를 만날 수 있었다.
화엄사 흑매
처음 흑매를 보는 순간 나무의 모양이 한눈에도 여자의 몸매처럼 S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고매라면 그 등걸이 검고 거칠며 이리저리 형상이 뒤틀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 S라인의 몸매를 연상케 했다.
그 수형만 아름다운 게 아니고 색깔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기품이 있으면서 사람을 홀리는 요염함이라고 할까 마치 사대부가의 정경부인이면서도
기방의 기녀가 가지는 매력을 동시에 가진 듯 빠져들었다.
화엄사의 흑매가 화려한 아름다움이라면 백양사의 고불매는 새색시처럼 밝고 고운자태를 보여주었다.
수령 300년을 넘기면서 거칠게 굳어지고 뒤틀린 등걸.
그 등걸 가지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은 마치 초례청 새색시처럼 밝고 고왔다.
어떤 탐매 객은 그렇게 표현했다. 해마다 봄이면 매화꽃 그늘에서 매향샤워를 하고 나야
일 년이 시작되는 거라고 말했다.
그러했다. 부드러운 꽃그늘에 앉아 고요속에 젖어들면 온몸에 젖어드는 그 향기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그 자체였다.
법당에 들리지 않아도 경전을 통달한 듯 몸도 마음도 무념무상의 지경에 이르렀다.
백양사 고불매
수백 년 세월 속에 등걸은 거칠어져도
해마다 새봄으로 피어나는 꽃잎
해가 갈수록 그 향은 더 깊어지고
그 꽃잎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꽃그늘에 앉으면
그 곳이 바로 천상의 공간처럼
몸도 마음도 하늘에 닿아
아득히 번져나는 기쁨
화엄경이 따로 없는 듯하다
화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변함없는 향기, 그 맑은 향이 좋아서
해마다 묵은 등걸 앞을 찾는 사람들 줄을 선다
나이 들어 늙음을 탓하지 말고
수 백년 살아온 매화나무처럼
해마다 새봄으로 꽃피우는 마음과
자신만의 향기를 지닌 품격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창조하는 삶의 지혜
600년 세월을 건너온 매화향이 전해 준다.
2016.4.5.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