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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가고 싶은 곳

[대구올레 7선 ⑤] 구암마을 가는 길

by 매화연가 2013. 5. 27.

[대구올레 7선 ⑤] 구암마을 가는 길

 

‘걷기열풍’ 달구는 달구벌 한바퀴

 

 

월간마운틴 | 정리 곽정혜 기자 · 자료제공 대구녹색소비자연대 |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국내 대표 분지지형 도시, 대구. 주위에 많은 산이 있지만 대구 시민들은 그중 팔공산을 가장 으뜸으로 친다. 계절마다 색다른 멋으로 다양한 산세를 자랑하고, 고려시대의 역사와 불교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팔공산에는 '대구올레'가 있다. 놀미 쉬미 느리게 걷는 올레길에서 바삐 지나쳐 보지 못했던 팔공산의 속살도 들여다보고, 이곳에 기대 살아가는 지역주민들과도 소통해보시길. 대구올레 중 7개 코스를 독자들께 소개한다.




↑ 길 양옆으로 논이 훤하게 펼쳐져 바람이 불어오면 벼가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구암마을. 이 동네에서는 시기별로 다양한 농촌의 일과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구암마을은 약 200년 전 현동수라는 사람이 개척한 곳으로, 마을 옆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구암(龜岩)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구암(九岩) 마을로 불린다. 팜스테이를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 동네에서는 시기별로 다양한 농촌의 일과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들녘 도로를 지나 좁은 농로로 접어들면 길 양옆으로 논이 훤하게 펼쳐져 바람이 불어오면 벼가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가을철이면 황금빛 들녘이 장관을 이룬다.

도로 맞은편은 450여 년 전 순흥안씨 일족이 터를 잡아 일군 내동마을이다. 마을의 형세가 좌우는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안에 있는 자리가 너무 아늑하고 따뜻해 내동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미대동의 안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속골' 혹은 '소곡'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좁은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수령 500년 된 노거수 '안정자'를 만날 수 있다. 고려조 안유 선생의 후손인 안황이 애지중지했다는 이 노목은 높이 15m, 둘레 7.3m로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 아래에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조선 인조 때 선비 채명보가 학문을 강론했던 성재서당


 

발길을 돌려 농로를 지나면 야트막한 삼마산이 나오고, 오솔길 같은 능선을 따라 가면 성재서당에 도착한다. 이후 추원재와 재활용집하장을 지날 때면 마을의 개들이 짖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눈길 닿는 곳마다 팔공산에 기대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발길은 이 코스의 마지막인 미대동에 이른다. 조선 명종 때 채송담이라는 선비가 정착해 이룬 이 마을은 인근의 미대사(美垈寺)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 부락 중 가장 개발이 덜 된 미대마을에서 고즈넉한 농촌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코스정보

구암마을에서 출발해 미타사와 내동 굴다리→삼마산 능선길→성재서당→추원재를 거쳐 미대동에서 끝을 맺는 이 코스의 총거리는 6.2km지만, 전체적으로 완만한 길이라 2시간 내외면 주파할 수 있다. 벼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철이 특히 좋으며, 농장주변 안내판에 연락처가 기입되어 있어 현장에서 농산물 구입도 가능하다.

교통

대구지하철 1호선 아양교역에서 시내버스 401번 혹운 급행1 이용. 401번 이용 시 25분 가량 소요되며, 급행1 이용 시 35분 소요. 팔공1 버스를 이용하고자 할 때는 평광동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3개 노선을 타고 '구암동'에서 하차한다.

 

주변볼거리

추원재

인천사람 채선용의 후손들이 그의 선조를 기리기 위 해 1820년에 지은 재사. 원래의 재실은 화재로 불타고, 1881년에 고쳐 지은 이래로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은 방 2칸과 대청 2칸이 남아있다.

성재서당

조선 인조 때 선비 채명보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천이 본관인 채명보의 호는 선견이며,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다. 광해군 9년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인조2년 '이괄의 난' 때 향병을 모집해 출병했다. 이후 왕이 내린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낙향하여 성재정을 건축하고 학문을 닦았다.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ㅡ 출처 :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newsview?newsid=20130517122110144 (월간마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