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이기철
꽃 피우지 않고도 저렇게 즐거운 삶이 있다 돌 지난 상수리나무 잎새가 새끼 노루의 목덜미 같다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햇빛이 오면 금세 즐거워지는 나무들 나무들이 즐거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람이 오면 한 군데도 비워둔 데 없이 왁자히 수선 떠는 아이들 같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같다 오전이 펼쳐놓은 출렁거리는 광목 같다 일찍 여름을 길어낸 삶들은 장화처럼 푹푹 깊어져 손대지 않아도 마구 풀물이 들 것 같다 저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맛있는 것 먹고 떠난 동생 같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도 저 혼자 즐거운 삶이 여기 있다
-시집『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
'즐거움 > 내가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에 먹히다/조동례 (0) | 2013.07.11 |
---|---|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문태준 (0) | 2013.05.23 |
세상 끝의 봄/김병호 (0) | 2013.05.09 |
묵언/이시환의 자작시 해설 (0) | 2013.05.08 |
이시환의 「하산기下山記・2」 (0) | 201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