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봄 김병호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느냐고 물어오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김병호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 《월간문학》,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연구서 『주제로 읽는 우리 근대시』가 있다.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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