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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이시환의 「하산기下山記・2」

by 매화연가 2013. 5. 5.

[자작시 해설②]


-이시환의 하산기下山記2-




어쩌다,

내 무릎 뼈를 쭉 펴면

밤새 흐르던 작은 냇물 소리 들린다.


더러,

동자승의 머리꼭지를 찍고

돌아가는 바람의 뒷모습도 보인다.


꼭두새벽마다 울리는

법당의 종소리도 차곡차곡 쌓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지상의 꽃들이 피었다 진다.



시 「하산기下山記2」전문이다.

우연히 알게 된, 재일교포 문학평론가요 번역가이신 姜晶中(강정중 1939 ~ 2001) 시인께서 위 작품을 일역日譯해 주시고, 어느 정기간행물에 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했었다. 그 무렵 강 사백께서는 제게 말하기를 ‘어쩌면 이 작품 「하산기」와 「하늘」이라는 작품이 당신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1990년대의 중반쯤의 일인 것 같다.


위 작품은 보다시피, 전체 4연 10행의 비교적 짧은 시이다. 내용 전개상의 구조 또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곧, “~하면 ~하다 / ~하면(생략됨) ~하다 / ~하면(생략됨) ~하고 / ~하면(생략됨) ~하다”의 하나의 조건에 따른 네 개의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결과들이 시청각적인 판단들이지만 단순 나열제시됨으로써 구축되어지는 제2의 사유세계가 다분히 심미적審美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유세계는 ①밤새 흐르는 냇물 소리(제1연) ②바람과 동자승(제2연) ③새벽에 울리는 법당의 종소리(제3연) ④피었다지는 지상의 꽃들(제4연)이라는 4가지 객관적 요소들을 가지고 만들어 놓는 화자의 주관적인 세계로 그가 꿈꾸는 이상세계인 것이다. 곧, 오랫동안 가부좌하여 앉아 있다가   - 이를 ‘명상’이라 해도 좋고, ‘수행’이라 해도 상관없다 -   다리 풀기를 하면, 다시 말해서 명상 혹은 수행을 쉬거나 마치어 하산하면 이따금 ①밤새 흐르던 냇물 소리 들리고(제1연) ②동자승의 머리꼭지를 찍고 돌아가는 바람의 뒷모습도 보이고(제2연) ③새벽 종소리도 차곡차곡 쌓이고(제3연) ④일순간 꽃들이 피었다 짐도 훤히 내려다보인다(제4연)는 것이다. 이는 분명 명상 혹은 수행생활로 얻어진, 눈을 감고 보는 눈 아닌 눈인 심안心眼에 비추어지는 이상세계인 것이다.


화자의 그 이상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은 몇 가지의 장치를 굳이 확인하자면 이러하다. 첫째, 두 개의 부사副詞 곧, ‘어쩌다’(제1연)와 ‘더러’(제2연)에 숨어 있는 각별한 의미이다. 그 숨은 의미가 쉬이 감지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는 ‘이따금’혹은 ‘드물게’의 뜻으로 화자가 굽혔던 무릎을 펴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바꿔 말해서 무릎을 굽히고 있는 시간이 길거나 많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러’ 역시 ‘이따금’혹은 ‘드물게’의 뜻으로, 동자승의 머리꼭지를 찍고 돌아가는 바람의 동작이 흔한 일이 아님을 암시전제하고 있다. 동시에 ‘어쩌다’와 ‘더러’가 주는 리듬감과 내용이 긴장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둘째, ‘종소리가 차곡차곡 쌓인다’는 표현에서처럼 청각으로써 지각되는 내용을 시각적인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든가, ‘눈 깜작 할 사이에 지상의 꽃들이 피었다 진다’에서처럼 물리적으로 길고 광활한 시공간을 압축해서, 그야말로 축지縮地축시縮時 법을 써서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도 다 내려다보게 되는 것과 같은 시점視點시계視界를 가진다는 점이 화자의 수행생활을 엿보게 한다.

셋째, “더러, / 동자승의 머리꼭지를 찍고 / 돌아가는 바람의 뒷모습도 보인다.”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는 화자의 눈도 그렇지만, 그 바람이 동자승에게 장난을 걸듯 그의 머리꼭지를 살짝 찍고서 시치미를 떼듯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화자의 마음이나, 그런 바람의 뒷모습을 웃으면서 훔쳐보듯 내려다보는 화자의 심안이 그야말로 구김살 없는 동심童心처럼 천진무구天眞無垢하여 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하리라 믿는다.


모름지기, 시란 아름다움이 샘물처럼 솟아나야 한다. 한 편의 시에서 그 아름다움을 배제해 버린다면 그것이 아무리 깊은 의미를 내장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시라 여기지 않는다. 시를 읽으며 성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고, 그러잖아도 복잡한 머릿속을 시를 읽으며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2013. 0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