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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여행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1

by 매화연가 2017. 12. 10.


표트르 1(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69~ 172528)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682~ 1725)였다.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 표트르 벨리키)로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자이다. 전제정을 세우고 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등 나라의 모든 부분을 개혁했다.

어린 나이로 공동 제위에 올라 통상적인 황제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게 됐고, 군대 놀이와 항해 놀이를 하면서 군사술을 익혔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얼지 않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유럽의 발전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절대주의 왕정을 확립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근대 정규군을 창설하고 서유럽의 역법을 도입했으며,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 귀족의 지위를 관등표로 수정해 혈통이 아닌 업무에 따른 승급 체계를 갖추었다. 제조업과 야금업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교역량은 7배 증가했다.





 

인격과 업적   

표트르는 키가 2m나 될 정도로 매우 컸고 잘생겼으며 체력도 강했다. 이전의 차르들과는 달리 비잔틴의 후광을 거부했으며 행동이 매우 소박했다. 맥주 한 잔을 놓고 조선공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외국선원들과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던 그는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종 낡은 구두와 모자를 쓰고 나타났으며 자주 군인복장을 하고 다녔다. 때로는 엄청나게 술을 마셔댔으며 그의 손님들도 그렇게 마시도록 만들었다. 정직하지 못함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였던 그는 화를 낼 때는 무서웠으며, 반대에 직면하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에는 그와 친밀한 사람들만이 그를 달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2번째 부인 예카테리나가 그런 면에서는 최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트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주 그녀에게 부탁했다. 때때로 표트르는 고위 관리들을 매로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멘시코프 공도 많이 얻어맞았다. 정치가로서 표트르의 뛰어난 재능의 하나는 최고 귀족가문의 사람이건 사회의 밑바닥 사람이건 고위직에 재능 있는 인물을 선택해 쓸 줄 아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국가의 머슴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아랫 사람들의 위치에 자신을 둘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정직함을 갖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그는 그의 군경력을 가장 낮은 계급으로부터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을 그 기본부터 시작해서 완벽하게 익히고 또 실질적으로 수행한 봉사에 따른 승진만을 기대할 것을 요구했다 

표트르의 인격은 러시아의 전역사에 그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이고 명민한 지성을 소유하고 원기왕성했으며 용기 있고 근면했으며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러시아의 전반적인 이익과 그 자신의 특별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지탱하기 위해 복잡하게 변화하는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러시아와 서유럽 국가들 간의 격차를 메우지는 못했지만 국민경제·교역·교육·과학·문화·대외정책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다 

러시아는 강국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러시아의 협력이 없이는 어떠한 유럽의 문제도 해결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내정개혁은 이전의 어떠한 개혁자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이자 그를 계승해서 로마노프 왕조 최초의 여황제가 되는 예카테리나(Yekaterina I Alexeyevna)는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일단 부모의 이름 이외에는 그녀의 가계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녀는 발트 해 연안에서 태어났으며,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아니라 라트비아인이나 에스토니아인이었다. 그녀가 태어날 즈음 이 지역은 신교국인 스웨덴에게 점령당해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러시아 정교가 아니라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다 

그녀의 이름도 러시아의 전통적인 이름인 예카테리나(Yekaterina)각주1) 와는 거리가 먼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라는 라트비아식 이름이었다. 그녀가 한 살이 되기 전인 1684년부터 다음해까지 발트 해 연안을 휩쓸었던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부모가 사망하면서 마르타의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다섯 형제 중에서 막내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형제들은 이때 헤어졌다가 수십 년 후에야 다시 만나게 된다.


 

표트르와의 만남   

마르타와 표트르는 1703년 초에 멘쉬코프의 집에서 처음 만났으며, 그 이후부터 줄곧 표트르를 위해서 봉사하게 되었다.

1704년에 마르타는 첫 아이 파벨(Pavel Petrovich)을 낳았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 그녀는 루터파 프로테스탄트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으며,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Yekaterina Alexeyevna)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둘째 아들 표트르(Pyotr Petrovich)를 연년생으로 낳고, 2년 후에는 첫 딸 예카테리나(Yekaterina)를 낳았다. 그러나 이 세 아이들은 모두 1707년과 1708년 사이에 사망했다.

연이어 아이들을 잃는 비극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던 자신들의 잘못에 기인한다고 믿은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철저한 개인적인 행사로 치러졌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비밀로 취급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시작해서 점차 평생의 반려자로 변했다. 여기에는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뛰어난 품성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쾌활하고 활기에 넘쳤으며 남다른 인내심과 겸손함도 갖추고 있었다.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표트르의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어서 그가 화를 내면 사람들이 모두 일단 피하거나 움츠러들었지만, 예카테리나만은 그에게 맞서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고 이것은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정의''공정함'이라는 가치를 우선했던 표트르를 따라 후일의 예카테리나도 엄격한 통치를 시행했지만, 표트르와는 달리 부드러운 방식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사람이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도 정반대였다. 표트르가 직설적으로 퍼붓는 반면 예카테리나는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침묵 시위가 여러 달을 갈 때도 있었기 때문에 최종적인 승자는 항상 예카테리나였다고 한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17122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가장 초기에 세워진 건물들 중 하나인 성 이삭 성당각주 에서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5년 전 알렉산드르 멘쉬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했던 초라한 비밀 결혼식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제대로 격식을 차린 화려한 공식행사였다. 예카테리나의 존재야 당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이지만, 예카테리나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일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보잘 것 없는 위치에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표트르에게 또 러시아에게도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였으며, 차르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 예카테리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들은 예카테리나가 낳은 연년생 두 딸 안나(Anna Petrovna)와 옐리자베타(Yelizab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다음 세대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예카테리나는 비록 읽고 쓰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 현명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통치자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긴 전쟁과 표트르의 강압적인 통치방식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이다. 기록이나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왜곡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비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러시아 역사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의 후손들이 차르를 계승하던 시대에는 그녀를 논의의 주제로 삼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인들은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모든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개혁이나 혁명 다음에는 반드시 반동이라는 반작용의 시대가 뒤따른다는 것인데, 러시아의 경우에는 그녀가 표트르의 개혁을 완화하면서 그 반작용을 최소화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중세를 벗어던지는 작업은 표트르와 그녀의 딸인 옐리자베타에게 넘어가게 되지만, 그 승계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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