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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삼월 하늘로 건너온 꽃을 노래하다/이종암

by 매화연가 2014. 11. 25.

 

삼월 하늘로 건너온 꽃을 노래하다

-서정주, 문태준, 조운, 문인수의 시

 

   

1. 시작하는 말

 

갑오년 새해가 밝은 지도 한 달을 넘어섰고, 음력설을 쇤 지도 며칠이나 지났다. 날씨가 좀 포근하긴 해도 아직은 겨울의 연속이다. 삼월이 되어야 봄이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삼월이 되어야 신학기의 새 삶이 시작된다. 시 전문 월간지우리3월호에는 잿빛 겨울 하늘이 아닌 꽃봉오리가 뺨 부비고 있는 삼월의 하늘을 노래한 서정주 시인의密語를 먼저 소개한다. 그리고 2월과 3월의 시간을 깁고 있는 꽃, 예부터 우리네 선조들이 좋아했던 매화(梅花)를 노래한 문태준 시인의이제 오느냐, 시조 시인 조운의古梅를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읽고 싶다. 마지막으로는 매화 폭발하고 동백 대가리들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을 장쾌한 소리마당으로 변용한 문인수 시인의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라는 시에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따라오시든 말든 그냥 푹 젖어들고 싶다. ? 겨울 지나 꽃이 피고 지는 삼월이 왔으니.

 

 

2. 삼월을 노래한 시들

 

 

密語

 

-서정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재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눌가에 머무른 꽃봉우리보아라

 

한없는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

체일을물은듯, 아늑한 하눌가에

뺨 부비며 열려있는 꽃봉오리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눌가에

인제 바로 숨 쉬는 꽃봉오리보아라

 

-未堂 徐廷柱 詩全集 1(민음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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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인부락의 족장 미당 서정주 시의 빼어남을 애써 달리 표현하여 무엇 하랴. 그냥 눈과 입으로 미당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그 가락과 서정을 내 몸에 담아두면 그만인 것을. 한국 시단에서 시의 리듬감과 서사적 성격을 이 양반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밀고 간 시인이 또 있을까. 密語는 서정주의 2시집귀촉도맨 첫머리에 나오는 시편이다. 꽃봉오리를 받아내는 삼월의 봄 하늘을 한없는 누예실의 올과 날로 짜 느린/체일을물은듯, 아늑한 하눌로 묘사하는 것 하며, 그 하늘가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굳이 잠긴 재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뺨 부비며 열려있는” “인제 바로 숨 쉬는것으로 그려내는, 또 이 모든 것을 우주의 비밀스런 언어, 즉 밀어(密語)라고 지칭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一品)이다. 그리고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에 일어나는 음악성은 또 어떠한가. 나도 꽃 피는 삼월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옛 동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태봉아, 팔수야, 또 명자야, 숙아!

 

 

 

이제 오느냐

 

-문태준

 

 

화분에 매화꽃이 올 적에

그걸 맞느라 밤새 조마조마하다

나는 한 말을 내어 놓는다

이제 오느냐,

아이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나는 또 한 말을 내어 놓는다

이제 오느냐,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

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

 

뜨거운 송아지를 여남은 마리쯤 받아낸 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

 

-문태준 시집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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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은 말한다. 매화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오는 것이다, 라고. 그래서 집 안 화분에 매화꽃이 오늘 걸 밤새 조마조마해 하면서 시인이 문득 내놓은 말이 이제 오느냐,”이다. 원래 이제 오느냐,”라는 말은 시인이 아버지에게 배냇적부터 배운말이다. 그가 어렸을 적 아버지한테 수도 없이 들었던 이제 오느냐,”라는 말을 지금 매화꽃에게도, 아비가 되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똑 같이 내어놓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오느냐, 라는 이 말이 얼마나 뜨겁고 깊은 말인지 깨닫는다. 그래서 이것은 말할수록 맨발 바람으로 멀리 나아가는 말/얼금얼금 엮었으나 울이 깊은 구럭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아버지한테 듣고 배운 말 한 마디로 이렇게 뜨겁고도 깊은 서정시를 써내는 문태준 시인의 장인적 솜씨가 놀랍다. 짧은 이 시의 얼개도 촘촘하고 튼실하게 잘 짜여 있다. 이제 오느냐, 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사용된 1연과 그 말의 의미를 나타낸 2, 마지막으로 그 말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3연의 유기적 결합이 서정의 물살을 세차게 뿜어내고 있다. 시를 몇 번 거듭해서 읽자니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굵고 깊은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 아부지!

 

 

 

古梅

 

-조운

 

 

梅花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조운 시집조운 시조집(작가,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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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취화선(임권택 감독)을 보셨는가? 보셨다면 그 영화 속 여러 장면 가운데 어느 부분이 제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으신가? 내게는 시커먼 고목의 매화나무 등걸이 홍매를 드문드문 피워 올린 장면, 그걸 오원이 그려낸 병풍 그림이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이 그림 속에 조운의 단형 시조古梅를 가만히 얹어본다.古梅를 읽으며 그 그림을 마음속에 펼쳐본다. 그러면 오원이 그린 병풍 그림이 내 것인 듯, 조운의 시조가 내가 쓴 것인 듯 지극한 즐거움에 젖어든다. 1947조선사에서 간행된曺雲時調集에 수록된 단형시조古梅는 조사 하나, 자모 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을 이럴 때에 쓰면 되는 것인가? 종장의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처럼 우리도 이렇게 늙어 가면 얼마나 좋을까?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 , ,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문인수 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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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에서 그 관객 수를 몇 십만 단위로 처음 끌어올린 게 소리꾼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임권택 감독의서편제가 맞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늘 시 이야기의 마당을 매화가 만발하고 보름달이 두둥싯 떠오른 하동 섬진강가 소리마당으로 펼쳐야 하겠다. 시인에게 제11회 김달진 문학상을 안겨다준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는 문인수 시의 특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그가 부르는 이 노래는 미세한 아름다움을 덧칠하는 게 아니라 장쾌한 스케일의 거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깊은 서정의 아우라를 가득 품고 있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에서 중천에 높이 걸린 달은 소리북이요, 거대한 지리산은 소리북을 치는 사내로, 섬진강은 길게 번져나가는 소리로 그려내고 있다. 이 얼마나 큰 소리마당인가! 그러면 어디 숨어 춤추는 미친 향기의 북채는 무엇이고, 선혈의 천둥으로 뚝, ,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은 또 무엇인가? 전자는 이렇듯 웅장하게 노래하는 문인수 시인이고, 후자는 그 노랫가락에 점점 깊이 물드는 귀명창의 독자인 우리들이라고 명명(命名)하면 어떻겠는가?

 

 

 

3. 닫는 말

 

정말이지 비밀스럽게 언어를 깁고 또 기워 아름답고도 고매((高邁)한 한국시의 진수를 한껏 펼쳐보인 서정주의密語와 조운의 단형 시조古梅가 있어 삼월에는 정녕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매화가 오는 한 순간을 통해서 제 자식과 아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울 깊게 엮어낸 문태준의 시이제 오느냐와 장쾌한 그림인 지리산의 사내와 하늘의 달북이 토해내는 섬진강의 긴 소리에 , , 듣는 동백을 노래한 문인수의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는 가히 매화와 동백을 노래한 우리 시대의 절창(絶唱)이다. 도대체 늙지 않는 서정시인 문인수 선생과 한국 서정시의 중추 문태준 시인. 동시대를 살면서 이런 분들의 절창(絶唱)을 계속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월간 <우리시> 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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