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2010.5 우포늪
늪의 內簡體를 얻다
송재학
너가 인편으로 붓틴 褓子에는 늪의 새녘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믈 우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웅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곡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잇다 수면의 믈거울을 걷어낸 褓子 솝은 흰 낟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눈엽처럼 하늘거렸네 褓子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머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內簡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대되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한 소솜에 遊禽이 적신 믈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만한 고요의 눈씨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褓子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을 늪을 褓子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어름이 너무 차겠지 向念
주)
1. 언니가 여동생에게 보내는 내간체의 느낌을 위해 본문에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을 참고로 고어 및 순우리말과 한자말 등을 취했다.
2. 현대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너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움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국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있다 수면의 물거울을 걷어낸 보자기 속은 흰 낮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새순처럼 하늘거렸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游禽이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向念
이 시는 송재학의 정교한 언어감각이 도달한 한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 늪을 보자기로 싸서 보낸다는 발상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늪과 한나절 집요하게 씨름해본 사람은 알리라. 고요한 수면에 얼마나 많은 것이 내려와 담기는지를. “새털”구름과 “되새 떼", "흰 낮달”이 우선 화자가 챙긴 목록이다. “수면의 믈거울”에 담기는 하늘의 구름은 늪을 “운문보”로 바꾸고 주름 잡히는 잔물결은 “항라”의 부드러운 촉감을 선사한다. 그러니 늪이 보자기가 될 수밖에. 늪을 항라 보자기로 싸 언니에게 보내는 동생의 내밀한 마음을 거친 삼베 같은 내 남성성이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늪의 풍광을 시집간 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정도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내간은 실은 동생이 언니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늪이 시인에게 보낸 게 아닐까. 수면에 비친 “흰 낟달”에서 문자향을 밭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개구리밥”새순이 적어내려 가는 “과두체” 글씨를 보는 사람이 다름 아닌 시인이란 말이다. “늪의 내간체를 얻다”라는 제목에 비춰볼 때 이 말은 한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언젠가 송재학은 자신의 시학을 “풍경과 몸의 연대”란 말로 요약한 적이 있다. 시적 주체와 대상이 한몸으로 겹쳐지는 순간,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자신의 내밀한 사연을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은 “과두체 내간”을 다만 받아 적을 뿐이다. 단순한 자기동일성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완전한 합일이다. “사물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사물의 의식이다”란 말을 한 사람은 메를로-뽕티다. 그는 또한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는 세잔의 말에 곁들여 “세계가 우리를 만진다”라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여기에 비춰볼 때, “유금이 적신 믈방울”이 손등에 미끄러져 “부르르 소름”이 돋았다는 구절은 실감으로 다가온다. 상상이 느낌의 실감으로 전이되는 엄밀한 의미의 물아일체순간. 이 시는 송재학의 섬세한 감각이 사물과 만나 빚어낸 ‘세계의 개진“이다. 이곳이 공소한 언어세공에 매달리고 있는 여타 시인들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정작 상상을 싼 또 다른 “보자기”에 있다. 섬세한 감각주의자에게 일상 언어란 기실 얼마나 성근 그물인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세계의 기미를 포착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내밀한 정서적 파동을 일상 언어로 번역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여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들은 자신의 감각을 실어 나름 독창적인 언어수단을 찾는다. 양말 뒤집듯 말을 뒤집거나 멀쩡한 언어에 스크래치를 내어 쓰거나 낡은 곳간에 처박혀 있는 케케묵은 낱말을 꺼내 먼지를 털어 쓰기도 한다. 내간체에 담은 고어표기의 이 산문시는 그가 고심 끝에 얻은 득의의 결실이다.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우리 시사에서 고어의 몸에 심운을 얹은 경우를 달리 보지 못했다.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으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제작에 오를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정지용이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했다. 그런 그가 만년에 의고체 산문시를 통해 도달하고자 한 것이 동양고전의 정신세계였으며 그 빛난 성취가 『백록담』시편이었다. 이러한 시적 전통이 송재학의 이 작품을 통해 새롭게 변용되어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의고적 문체라는 낯선 형식이 수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송재학은 자신의 예각적 감각으로 포착한 늪의 비밀을 은근한 동양적 아취로 담아내기 위해 내간체 고어표기라는 참신한 형식을 창출한 것이다. 형식적 특징을 짚어보면, 내밀한 정조를 담아내기에 적합한 내간체 형식에 낯선 표기의 고어가 내간체의 빠른 가독성을 늦추는 저항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자”, “항라”, “내간”, “운문보”, “향념”과 같은 한자말이 백설기에 박힌 통팥처럼 점점이 박혀 의미의 표면장력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옛 내간의 관용적 끝인사인 “향념”이란 단어가 방점처럼 시행 전체를 마무리하여 악센트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이채로움은 사물의 풍요로운 감각적 리듬과 조응하여 한 편의 아름다운 시편을 빚어낸다. 순우리말의 고전 문체를 통해 전달되는 전아하고 고담한 정취. 이 시는 “수사와 미학으로 세계를 읽으려는” 송재학의 욕망이 도달한 한 극점이다. 동시에 언어조형물이 정신의 단면과 몸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내는 드문 사례를 한국시가 얻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 장옥관
계간 <시안> 2008. 겨울호
출처 : 알게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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