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길목
황여정
휴가의 마지막 날처럼
순간이 마디마다
짜릿하게 걸린다
저녁놀같은
눈물이 뭉클 솟는다
내 생의 절반이 울대에 걸리며
넘어지더니 덩달아 9월로 건너는
징검다리가 유난히 아프다
해가 짧아지고
어둠살이 깊어지고
분주한 하루는 과속이다
이즈음에는 그 흔한
독수리의 눈처럼 매달린
속도위반을 측정하는 단속장비도 없다
배롱은 아직도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데
저 꽃,
얼마나 깊고 깊은 어둠속에서 건져 올린
뿌리의 해탈인가
내 어둠의 뿌리는
어디 쯤에서 빛을 건져올리는가
언제쯤 해탈의 꽃을 피워 올리는 가
오관을 서성이던 희로애락은
지금 쯤 김칫독처럼 익어가는가
9월의 길목을 건너는
징검다리, 참
아프다
저녁 안부
황여정
오랫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했어
아침은 언제나 밖으로 열리고
낯선 하루를 맞이하느라 바쁘기만 했지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그들이 내게 먼저 안부를 물어왔고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내 답은 달라졌어
하루여
나를 싣고 가는 하루여
오늘은 내게 안부를 묻고 싶네
어둠에 머리를 누이고
여름 숲같이 무성한 날들을 떠 올리면
항아리 속 김치처럼 곰삭은 시간들
잘 익었다고 칭찬해 주고 싶네
이제는
가시를 빼고 부드러워져야만 해
가시는 내 속에 있지만
투명인간처럼 훤히 드러나
살아가는 날을 부끄럽고 야위게 만들어
서늘한 눈빛으로 익어가는 가을
나무들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제 몸을 치장하며
겨울 속으로 걸어가는 이 시간
오늘은
낯선 하루에게
몇 번이나 웃어 주었는지 묻고 싶네
은방울꽃, 그 남자
황여정
낮 12시
김광석 거리에서
한 사람은 맹물을 마시고
또 한 사람은 막걸리를 마시고
나머지 세 사람은 올드 파를 마셨다
152살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토마스 파의
위스키 향을 음미하며 체인징 파트너를 감상하고
페티 페이지와 오드리 헵번과 비비안리를
그리워했다
속초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듯이
가슴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흥에 취한 H 씨가 한 많은 대동강을 노래하자
연달아 L 씨의 통기타 선율이 유튜브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 1939년에 만들어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장대한 스케일과 ‘타라의 테마’가 오후 한나절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술 보다 더 취하게 만드는 풍류의 분위기를 타며
한 남자는 자꾸자꾸 감정에 울컥거리기 시작했고
아, 그리고 깨어졌다
속살처럼 아린 상처를 드러내고
자신의 깨어짐과 봉합된 그의 가족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고
깨어지지 못함은 끝내 외롭고 슬프다고 말했다
술상은 끝이 나고 잘 익은 호박잎과 강된장으로 차려진
밥상 앞에서 노을 같은 시간을 쌈 사서 먹었다
타임머신처럼 휘돌던 시간은 다시 오후 3시로 돌아왔고
은방울꽃 같은 이야기가 조롱조롱 매달린 한 나절
참 맑다,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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