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밤여울/황동규

by 매화연가 2019. 5. 8.


 밤 여울

 

아주 캄캄한 밤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마음속이 온통 역청 속일 때

하늘에 별 몇 매달린 밤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이 더 살갑다.

두 눈을 귀에 옮겨 붙이고

더듬더듬 걷다

갈림길 어귀에서 만나는 여울물 소리,

빠지려는 것 두 팔로 붙들려다 붙들려다

확 놓고 혼자 낄낄대는 소리.

하늘과 땅이 가려지지 않는 시간 속으로

무엇인가 저만의 것으로 안으려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는 소리.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 가고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에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삼남에 내리는 눈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 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기


하루종일 눈. 소리없이 전화 끊김. 마음놓고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음.

길 건너편 집의 낮불, 함박눈 속에 켜 있는 불, 대낮에 집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불, 가지런히 불타는 처마. 그 위에 내리다 말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눈송이도 있었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비채를 휘두르며 불길을 잡았음. 불자동차는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달려옴. 이하 생략.

늦저녁에도 눈. 방 세 개의 문 모두 열어놓고 생각에 잠김. 이하 생략.

"혼자 있어도 좋다"를 "행복했다"로 잘못 씀.

 

 떠돌이 별


천문학자들은 항성을 행성보다 더 큰 일로 다루지만

나는 떠돌이별,

저 차돌 같은 싱싱한 지구 냄새에 끌려

늦봄의 김포와 강화를 떠돌았습니다.

길에는 붓꼿이 필통처럼 모여 피어들 있고

산 밑에는 수국(水菊)이 휘어지게 달려

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마니산 중턱에 올라 모든 별이 폭발하듯 떠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떠돌이별 하나가 광채도 없이

마니산 중턱에서 숨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오늘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침에 편지 반장 부쳤을 뿐이다

나머지 반은 잉크로 지우고

<확인할 수 없음>이라 적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주소뿐이다

허나 그대 마음에서 편안함 걷히면

그대는 無名氏가 된다

숫자만 남고

가을 느티에 붙어 있는

몇 마리 까치가 남고

그대 주소는 비어 버린다

아침은 걸르고

점심에 소금 친 물 마셨을 뿐이다

우리에 나가

말 무릎 상처를 보살펴 준다

사면에 가을 바람 소리

울타리의 모든 角木에서 마음 떠나게 하고

채 머뭇대지도 못한 마음도 떠나고

한 치 앞이 캄캄해진다

어둠 속에

서서 잠든 말들의 발목이 나타난다

내일은 늦가을 비 뿌릴 것이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시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탁족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허공의 불타

-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위에 붙어 있는 풀들도 허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내민 팔들이 질긴 것 같지만

허공 쪽에서 잡으면

팔을 탁탁 끊어버린다.

그렇다. 밖으로 내민 것 끊지 않고

허공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저 아래 새들이 날고

그 밑에 바위 그림자 가라앉을 때

등 뒤에서 태양이 머뭇거릴 때

늦가을 산정(山頂) 바람 예리한 칼끝은

줄곧 옷가슴을 들치며

심장이 여기지, 여기지, 묻는다.

불타와 예수의 앞자리치고 위험치 않은 자리 어디 있으랴?

허공에 나앉은 불타,

몰래 밖으로 내미는 인간의 팔 탁탁 끊어주소!

나무뿌리에 되우 낚아채인 다리 후들거림 멎으며

허공이 텅 빈다.


삼랑진 만어사 물고기 바위들

차곡차곡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도 아닌
혼자 사는 너럭바위도 아니고
언덕 아래로 함께 굴러내리는 몽돌들도 아닌
그런 삶을 본 적이 있는가?
한 골에 그냥 모여 살고 싶어서
모여 서로 몸 비비며 살고 싶어서
만어산9부 능선까지 만 마리 물고기가 기어오르다
저 멀리 낙동강 가을 물빛이 불렀던가
한번 모두 뒤돌아보아
소금기둥 대신 바위들이 되어
두드리면 생각난 듯, 잘들 있지? 종을 치고
두드리지 않으면 달개비 구절초와 함께 질펀히 살고.
일으켜 세우려 들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저도 몰래 주지(住持) 되어 만나고
다음 순간 손 털면 범종 소리
범종 소리.

2001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 중앙일보.문예중앙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꽃의 고요 / 문학과지성사 / 2006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 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찢겨져도 사라지기 어렵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눈 맞추고 헤어진 곳을 찾아보리라.

시전문 계간지 딩아돌하 창간호


달밤

누가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다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 중에서


이백李白 주제에 의한 일곱 개의 변주곡

때절은 시름 씻어내며
띠 풀고 계속 술을 마시리로다
정다운 밤은 맑은 얘기를 낳고
환한 달은 잠자리에 들지 못하게 하네.
취기 올라 빈 산에 누우니
하늘과 땅이 곧 이불과 베개.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良초(雨밑에 肖)淸談 皓月未能寢
醉來臥空山 天地卽衾枕
-<友人會宿>

1
소주와 안줏감을 들고
친구 몇과 사자산(獅子山) 속으로 들어간다.
가을 깊어 능선에는 단풍이 다 지고
적멸보궁 가는 길 양옆에는 오히려 단풍뿐이다.
보궁 앞에서 종이 술잔을 돌리노니
찬 술이 새지 않고 밥통에 듦이 고마워라.

2
운명이여, 그대가 만약 존재한다면,
이수교와 총신대 역 사이에서
차를 몰고 있는 나를 잠시 잊어다오.
잊어다오, 내 나이와 주민등록번호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잠시 음심에 빠져
남해(南海) 해변 달리듯 차를 몰고 있는 나를 잊어다오.

3
책장 속에 묻어두었던 꼬냑 병을 오랜만에 캐어내
마개를 조심히 비튼다.
가을 깊은 밤 성냥갑 아파트 속에
마른 성냥개비, 마른 성냥개비 확 타버릴!
술에게 한껏 심호흡시킨 후 그의 거처를
따뜻한 인간의 배로 옮겨준다.

4
마신 약수(藥水)들이 때로 속에서 부른다.
약수를 담았던 산들이 부른다.
예컨대 오대산은 골짜기마다 절이 들어 있고
절마다 목마른 곳에 약수 고여 있었네.
얼음 사이로 따뜻한 물 떠 마시며 몸 떨었노니
몸 식을 때 따뜻한 무엇 몸 속에 고이지 않으랴.

5
이즈음 조금 마시고도 취하니
한수(漢水)가에서 큰 돈 없이 살 수 있겠구나.
전엔 술의 힘 빌어 잠을 이루더니
이젠 술이 내 몸 속을 빌려 먼저 잠든다.
봄 저녁 짧아 텔레비 졸게 내버려두고
혼자 신명나게 눈감고 앉아 있는 날 늘어라.

6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는
간지럼 잘 타는 주목(朱木)이 살고 있고
경남 남해 용문사에는
입 셋 달린 삼혈포(三血砲)가
밥통 셋 다 비우고 살고 있다.
그 절 아랫마을에선
땅 속에 숨었던 다천(茶川) 석탑이 죽순처럼
막 땅 밖으로 나오고 있다.
세상 어디에도 영물(靈物) 살지 않는 곳 있으랴.
새벽빛 터지는 삼천포 어시장에선
숨죽이고 눈흘기는 이쁜 물고기들이
그대의 혼을 끌리.

7
구름 위로 달이 고개를 내밀다 얼굴 숨긴다.
달에게 하늘은 무엇일까, 별 듬성듬성 뜬 하늘?
미래의 달 인간 지구 빛에 잠 못 이룰 때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 있어 인간은 결국 인간으로 남지 않을까?
하현(下弦)달 멋대로 제 길 가게 내버려두고, 자 한잔,
그대와 나 붙박이 달처럼 당당하게.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사람 모여 사는 곳 큰 나무는
모두 상처가 있었다.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오후내 저녁내 몸 속에서 진 흘러나와
찐득찐득 그곳을 덮어도 덮어도
아직 채 감싸지 못하고
쑤시는구나.
가만, 내 아들 나이 또래 후배 시인 랭보와 만나
잠시 말 나눠보자.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시집 ; 몰운대行/문학과지성사


꿈의 꿈


지난 몇해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빗소리.
아침부터 시작해서 낮을 보내고
오후에도 잊힌 듯이 내리는 빗소리.

오늘은 연구실 창 밖 까치집을 적시고
그 밑에 새로 준공한 아랫집도 적시고
보이지 않는 까치새끼들
발톱까지 적시고
더 적실 것이 없어
맥을 놓아버린 빗소리.

발 하나쯤
시간 밖으로 내어놓은 빗소리.




'즐거움 > 내가 좋아하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문객/정현종  (0) 2020.02.18
황동규 시인  (0) 2019.05.08
박재삼 시인  (0) 2019.04.26
천년의 바람/박재삼  (0) 2019.04.24
봄길/정호승  (0) 2019.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