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갈대밭에서
갈대밭에 오면
늘 인생의 변두리에 섰다는
느낌밖에는 없어라.
하늘 복판은 여전히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날지만
쓸쓸한 것은 밀리어
이 근처에만 치우쳐 있구나.
사랑이여
나는 왜 그 간단한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대가 없는 지금에사
울먹이면서, 아, 흐느끼면서,
누구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소리로
몸채 징소리 같은 것을 뱉나니.
사랑의 노래
박재삼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한사람을 찾는 그 일보다
크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 보냐.
그것은
하도 아물아물해서
아지랭이 너머에 있고
산 너머 구름 너머에 있어
늘 애태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찾아 헤매는 것뿐
그러다가 불시에
소낙비와 같이
또는 번개와 같이
닥치는 것이어서
주체할 수 없고
언제나 놓치고 말아
아득하게 아득하게 느끼노니.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간절한 소망
박재삼
나무는 떨어낼 것을
다 떨어낸 다음
엷은 눈옷이나 쓰고
쌀쌀한 하늘의 가락에 맞추어
잔가지가 노래하는 것
그것만이 남았다.
내 몸에도 쓸데없는 것은
체로나 걸러낼까
그리하여 앙상하고 여윈대로
내 겨레 내 강산을 아끼고 기리는
그것만이 남거라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바람의 내력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일월 속에서
박재삼
산은 항상 말이 없고
강은 골짜기에 갈수록 소리내어 흐른다.
이 두 다른 갈래가
그러나 조화를 이루어
얼굴이 다르지만 화목한 영위(營爲)로
나가고 있음을 본다.
세상이 생기고부터
짜증도 안내고 그런다.
이 가을 햇빛 속에서
단풍 빛으로 물든 산은
높이 솟아 이마가 한결 빛나고
강물은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짝이는 노릇만으로
그들의 존재를 없는 듯이 알리나니
이 천편일률로 똑같은
쳇바퀴 같은 되풀이의 일월(日月) 속에서
그러나
언제나 새로움을 열고 있는
이 비밀을 못 캔 채
나는 드디어 나이 오십을 넘겼다.
세상을 몰라 묻노니
박재삼
아무리 눈으로 새겨 보아도
별은 내게는
모가 나지 않네
그저 휘황할 뿐이네.
사랑이여 그대 또한
아무리 마음으로 그려 보아도
종잡을 수 없네
그저 뿌듯할 뿐이네.
이슬 같은 목숨인 바에야
별을 이슬같이 볼까나.
풀잎 같은 목숨일 바에야
사랑을 풀잎같이 볼까나.
진실로 진실로
세상을 몰라 묻노니
별을 무슨 모양이라 하겠는가.
또한 사랑을 무슨 형체라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