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by 매화연가 2012. 4. 23.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이런 시구가 꼭 들어맞는 시절이 생의 어느 한 구비에선 꼭 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지요…… 우, 우, 우, 말을 더듬으며, 가슴에 돌처럼 맺힌 말들을 간신히 시로 꺼내면서, 그렇게 겨우겨우 견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지난 후에야 알았지요. 시가 나를 치유했다는 걸. 시가 나를 삶의 쪽으로 돌려세웠다는 걸 말이에요. 하여 저는 시의 치유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스밉니다. 당신도 나와 비슷한 시절을 건너왔군요. 동병상련의 침묵이 우, 우, 우, 꽃잎이 되고 새가 되고 더듬이가 긴 곤충이 되고 바람이 되는 길이 보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는 지금 아픈 그대여. 고통을 견디기에 시만큼 좋은 친구도 없답니다. 시의 손을 잡고 한 시절 건널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지금은 그렇게 스스로를 믿어 보자구요. 그렇게 애절한, 처연한, 거짓말들이여 쏟아져라. 우, 우, 우우, 더듬더듬 꺼내놓은 돌덩이 같은 말들에서 거짓말 같은 진짜 세월들이 기어코 꽃필 거예요.
 
문학집배원 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