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11:00
흥덕왕릉 촬영을 마치고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에 갔다.
일요일이지만 가끔 등산객이 몇 사람 보일뿐 조용했다.
얼었던 땅이 질척거렸다. 여래불에는 두 세사람이 삼각대를 세우고 있었고
그 사람들을 피해 오른 쪽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아! 다정하게 웃으며 반기는 여래불의 미소.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처럼 따뜻하다.
이곳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번에는 그저 돌에 새긴 불상일뿐
표정같은 건 느낄 수 없었는데, 오늘은 뭔가? 저 미소...
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慶州南山佛谷磨崖如來坐像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남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
개설
보물 제198호. 경주 남산 북쪽 기슭에 감실(龕室 : 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만든 집이나 굴 형태의 공간)을 파고 새긴 마애여래좌상이다. 불감은 높이 약 3m, 너비 3.8m의 바위 면에 깊이 1m, 높이 1.42m의 규모를 지닌 삼각형에 가까운 단면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감실을 파고 불상을 고부조로 새긴 가장 이른 예로서,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이 약간 부서진 것을 제외하곤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경주 남산 불곡(佛谷)은 이 마애여래좌상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마애여래좌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불곡 마애여래좌상 위부분에 목조 가구를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감실 주변에 근년까지 기와 조각이 산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전에는 목조 기와 건물의 전실(前室 : 앞 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불곡마애여래좌상은 마애불상의 일반적인 특징과 같이 윗부분을 보다 입체적으로 하고 아래쪽을 그보다 얕게 조각하였다. 불상은 선정인(禪定印 : 참선하는 모습의 손 자세) 형태의 수인(手印 : 손 자세)을 한 채 가부좌(跏趺坐 : 양반 자세로 앉은 모습)를 하고 있다. 불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두 손은 소매 자락 속에 넣은 다소곳한 모습이다. 불교 전래 초기에 승려들이 조용한 곳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서 참선 수행하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보물 제201호 경주 남산 탑곡(塔谷) 마애불상군에서도 나무 아래에서 참선 수행하고 있는 승려의 모습이 확인되어 이 부근에서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초기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바와 같이 이 불상에서도 머리와 발이 몸에 비해 큰 편이다. 낮고 편평한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 머릿결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소발(素髮), 둥근 얼굴, 미소를 띠고 있는 상호(相好 : 얼굴), 부드러운 어깨 등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이다.
한편 선각(線刻)으로 표현된 법의(法衣 : 불상의 옷) 자락은 흘러 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이와 같이 상현좌(裳懸坐 : 불상의 옷자락이 흘러내려 대좌 정면을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표현되는 대좌도 초기 불상에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불곡마애여래좌상은 낮고 넓은 육계와 둥근 얼굴, 아담한 체형, 부드러운 조형 등에서 중국 북제(北齊)시대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과 연관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불상은 삼국시대 7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징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바위를 깎아 불감을 만들고 정벽을 마애 기법으로 처리하여 불상을 봉안한 유일한 예이자, 참선 수행하는 모습의 선정인 불좌상으로서 가장 큰 예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불곡마애여래좌상은 경주 남산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예이다. 마애여래좌상은 남산 북쪽 기슭이 한적한 곳을 찾아 수행하던 신라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마애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많은 불상이 조성되는 단초를 제공하였을 뿐만아니라 경주 남산 불교 유적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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