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를 찾아서
문경 봉암사는
지금부터 1100 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가
창건한 고찰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사격이 높다고 하며
이곳은 신라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
켜 구산선문 희양산 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
으로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
중흥을 이룩한 대 선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이
소실된 것을 금색전과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했으며
봉암사는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에 있으며 멀리서
보면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봉암용곡이라 하는데 봉암사는 일년 중 초파일
하루만 절문을 열어놓고 참배객을 위해 출입을 허용
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절 가운데 가장 문턱이 높은
곳으로 1982년부터 산문을 패쇄 했으며 봉암사에는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3층석탑과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적조탑과 최치원선생의
4산비 중의 하나인 적조탑비 등의 소중한 문화
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사찰이기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봉암사이기에
더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다고 하는 대찰입니다
희양산봉암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봉암사의 일주문입니다
뒷면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있습니다
봉암사의 일주문은 2012년 2월 6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봉암사는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석문이 나타나는데 석문 우측에는
남무아미타불이란 글씨가 세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
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합니다.
봉암사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에는 좌측기둥에는 용추동천
우쪽 기둥에는 침류교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봉암사는 신라 선문구산 중의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인
덕분으로 한때 폐사 위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증창을 거듭해 옛 모습을
되찾고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 부흥된 것은
1947년이라고 하는데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
에서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결사도량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름 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으로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쳐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 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고 합니다
봉암사는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
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 되었으나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 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으며 1974년에 서옹 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
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고 합니다
봉암사는 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단에서는 1982년 6월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고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 하였습니다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며 1984년 6월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 여간 납자를 제접하여
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 스님을 다시 조실로 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다고 합니다.
봉암사 대웅보전의 좌우측 외부벽면에는
화엄경변상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보전을 향하여 좌측의 화엄변상도입니다
대웅보전 앞 뜰에 있는 노주석은 좌우에 각 1개씩 2개가 세워져
있는데 간주와 화대 받침, 화대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극락전은 목탑 형으로 건조된 건물로서 경순왕이 피난 때 원당으로 세운
유서깊은 전각으로 중간사적은 알수 없으나 여러번 증수를 하였습니다.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 봉암사 자리를 결정하고 그 곳에
있던 큰 못을 매몰하려는데 용이 서식하고 있는지라 지증 대사는 신통력
으로 용을 구룡봉으로 좇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봉암사는 중창 80년 후에 극락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었는데
그 후 고려 초에 정진국사가 주석하게 되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봉암사 극락전의 기단은 탑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상 하 갑석은
면석으로 처리하였고 기단 바닥은 장방형 판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내진주 4본으로 중층목탑을 만들었습니다
극락전에는 외진주를 기단 상대갑석 위에 3칸 형식을 세워 초층 지붕을
받게 하고 사천주를 세워 정방형 불전을 만들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 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습니다
정면에서 볼 때 4분합문으로 보이며 좌우측에는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마감하였으며 극락전의 2층은 다포작으로
주간포는 2구씩 사면에 넣고 주심포는 모두 귀공포입니다
문경 봉암사 지증 대사 탑(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은 보물 제137호이며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대웅전 왼쪽에 있습니다
지증대사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으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 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으며 왕은 지증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 라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증대사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습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고 밑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 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습니다
윗 단은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며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입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정교하고 치밀하며
윗 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 하였습니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을 새기고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지증대사 탑의 지붕돌은 8각이고 아래에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표현되어
겹처마 집을 보고 있는 듯하며 처마는 살짝 들려 있고 낙수면의
모서리선은 끝에 꽃장식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습니다.
지증대사 적조탑의 높이는 3.41m이고 지대석 너비는 2.28m의 탑으로
장중하면서 당당한 모습에 그 앞에 서면 숙연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 원년(서기 92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입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의 귀두는 한 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 형으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입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의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선생'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83세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다고
하는데 비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입니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는 보물 제138호이며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최치원의 4산비(四山碑) 중 하나라고 합니다.
지증대사(824∼882)는 17세에 부석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를 창시하였으며 헌강왕 8년(882)에 입적하자,
왕은 지증 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은 적조라 하였습니다.
거북모양의 비 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좌가 있으며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봉암사 금색전은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수행승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 하며
지증대사가 대중을 이끌고 와서 절터의 화룡점정으로
삼은 곳이 바로 이 금색전이라고 합니다
불유(佛乳)와 금색전은 도적의 소굴이 될 수 있을 만큼 기가 센 이 터의
비보책 으로 지증 대사는 네 개의 처마기둥을 세워 터를 누르고 철불
두 분을 모셨다고 하며, 그중 1구가 땅에 묻혀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봉암사 창건주 지증대사와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동시대의
인물이니, 이러한 풍수비보는 당시의 사찰에서는 널리
행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금색전 근처에 몇 십 년 전만 해도 파괴된 철조여래좌상이 있었
다고 하니 초창기에는 금색전 자리에 금당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신라 하대에 철불이 많이 모셔져 한 시대 특성을 이룬 만큼 구산선문의
하나인 이곳에도 철 불이 모셔졌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법당에는 통견차림으로 지권인을 한 화엄경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금색전이란 금색인을 모시는 집이며 금색인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인데
금색전은 불타 없어진 것을 1955년에 다시 세운 전각이라고 합니다.
금색전 뒷면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는 대웅전이라고 쓰여 있는데
봉암사의 본래 대웅전이 금색전 이었으며 지증 대사가 이 자리에
첫 전각을 세웠을 때의 대웅전 현판을 금색전으로 바꾸면서
뒷면에 걸어둔 것이라고 합니다
금색전(金色殿)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은 분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도 비교할 데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상 천지 내가 다 보아도
日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없도다.
불상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수염을 휘날리며 호위하고 있고
위에는 지혜의 문수보살과 실천행의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코끼리와 사자가 올라 앉아 있습니다.
어느 사찰이든지 조사전은 그 절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하는데 봉암사의 조사전은 가구식 기단 위에 앞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입니다
조사당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고 부처의 가르침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조사당(祖師堂) 주련
此外更無別物 (차외갱무별물) 이 밖에 또 어떤 특별한 물건 있으리
閃電光中作窟 (섬전광중작굴)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빛으로 굴을 만들고
打破虛空出骨 (타파허공출골) 공을 깨뜨려 없애고 뼈를 내보내리
井底泥牛吼月 (정저니우후월) 우물 밑 진흙소가 달을 보고 포효하고
雲間木馬嘶風 (운간목마시풍) 구름 사이 목마가 바람을 향해 울부짖는다.
把斷乾坤世界 (파단건곤세계) 하늘과 땅 온 세계를 잡아 끊나니
誰分南北西東 (수분남북서동) 누가 있어 남과 북, 서와 동을 분별하는가?
龍吟枯木猶生喜 (용음고목유생희)
용은 고사목을 오히려 살아 있는 듯 기쁘게 읊으며
髑髏生光識轉幽 (촉루생광식전유)
해골에서는 그윽한 알음알이의 빛 생기도다
磊落一聲空粉碎 (뇌락일성공분쇄)
선선한 한 마디 하는 부스러뜨리며
月波千里放孤舟 (월파천리방고주)
달 그림자는 작은 배를 천리나 멀리 띄워 보내네
조사당 삼면 벅에는 태고 보우스님을 비롯하여 봉암사를 지켜온 역대
조사스님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근래의 조사로는
향곡스님과 서암스님의 영정이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봉암사3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봉암사 3층석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며 조성 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정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3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희양봉의 장중하고 힘찬 기상이 휘몰아쳐 내려오다가 삼층석탑에 이르면
용트림으로 뻗어오던 기개는 일순 탑 앞에서 주춤하며 부드럽게
순화되어 강약의 절묘한 조화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입니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으로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 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는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합니다
봉암사 경내에 있는 근래에 세워진 범종각입니다
사물 중에서 목의의 모습이 오늘 따라
더 측은해 보이기만 합니다
옛날 봉암사에서 사용했다는 자연석을 다듬어서
만든 맷돌이라고 합니다
희양산 봉암사는 통일신라시대. 심충거사가 법랑선사와 신행선사의
법을 이은 지증선사에게 이곳을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는데
처음엔 거절하던 선사는 희양산을 둘러본 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봉황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였은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 같다며 경탄하면서 스님들이 수행
하지 않으면 도적소굴이 될 것이라며 봉암사를 창건해 해동에 들어선
선의 아홉 도량 가운데 희양산문의 중심사찰로 삼았다고 합니다
사량 분별을 끊고 공부하는 태고선원의 첫 문인 ‘진공문’
진공문(眞空門)은 나를 완전히 비운 상태로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들여다보고 잘못된 흐름을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행각하는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
본래면목을 찾는 곳인데도 소리 하나 없다고 하는 태고선원입니다
조계종 종립선원인 태고선원 입구에 이 문 안에서는 알음알이를
내지마라(入此門內莫存知解)는 주련이 있는데 참선하는 이는
문구를 따지거나옛사람의 말씀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 된다.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돼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선사들은 그래서 말을 아낀다고 합니다
묘유문(妙有門)은 평범함은 성스러움이 되고 진공(眞空) 속에
묘유(妙有. 지혜)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희양산문태고선원 이란 편액 밑에 돌사자가 지키고 있는데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한국불교에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결사가 봉암사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전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암사의 꿈’은
성철스님의 나이 36살 때인 1947년 가을 실현에 옮겨졌다.
청담스님, 자운스님, 우봉스님 등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봉암사에서
청정가풍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후 향곡스님, 월산스님, 종수스님, 보경스님, 법전스님, 성수스님,
혜암스님, 도우스님 등 20여명이 결사에 동참했으며 결사대중은
공주규약을 정하고,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현대 조계종의 근간을
봉암사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결사대중이 내세운 공주규약은
“삼엄한 불계와 숭고한 조훈을 근수역행하여 구경대과의 원만속성을 기함.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교칙 이외의 각자 사견을 절대 배제함.
매불자생은 불법파멸의 근본 악폐이니 기복구명의 무축행위는 단연 일소함.
수도사의 만고방양인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표치하에 운수반시 종전파침 등
여하한 고역도 불사함.
발우는 와철 이외 사용을 금함.
일체언동은 장중적정을 기하여 분잡훤란을 피함.
여외 각칙은 청규 급 대소율제에 준함.(중략)”
대중의 결의는 대단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참다운 불교를 세워야 한다는 그들의
용맹정진은 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의 빛은 지금도 조계종을 밝게 비추고 있다.
문경 조병활 기자의 글에서 옮겨온 글의 내용입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과 백운대를 오르는 길 목을 지키고 있는
거북이 초파일 행사에 참배하기 위하여
내려오고 있는 형상입니다
백운대의 넓은 암반 동북쪽에는 거대한 바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인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이 있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 좌상은 평소에 발원 기도하는 보살이라고 하며
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 하며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 하게 처리 하였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 좌상은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 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습니다
마애보살좌상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 121호이며 높이 4m,
너비 4.4m의 이 불상은 고려때 조각된 것이라고 합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멸실된 곳이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 마애보살 좌상은 매년 초파일 봉암사의 절문을 열 때
마다 참배객들이 이곳을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마애보살 좌상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는 봉암사 경내에 있어
봉암사 백운대라 부르기도 하며 물빛과 돌 빛이 옥과
같다 하여 옥석대 라고도 합니다.
불상 옆 바위에는 백운대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신라시대의 학자 최치원선생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곳 백운대와 마애보살좌상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면서 부처님 오신
날에만 출입이 가능한 곳입니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른다고 해서
봉암사 인근 계곡을 봉암용곡 이라고도 합니다
지증대사는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차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어 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며 경탄했다고 하는 곳입니다
상봉대사비는 봉암사 법당에서 약 100여m 쯤 떨어진 입구 쪽에
있는데 원래 논가에 두동강이 난채로 흩어져 있던 것을
봉암사 측에서 1987년도에 이곳으로 옮겨서
복원 히였다고 합니다
상봉대사비는 숭정 기원후팔십구년 병신(1716) 오월에 건립
하였으며 비문은 대재학 이덕수 가찬하고 조선 후기의
명필가 백하 윤순이 썼다고 합니다
상봉대사비에서 우측으로 휴휴암이라는 건물을 조금 지나면
정진대사원오탑비와 정진대사원오탑을 가는 길이 있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 비는 봉암사를 증흥한 정진대사의 부도탑 비로서
고려후기의 조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귀부와 이수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을 취하였으나 비좌가 큰 것이 특징입니다
정상에 화염보주가 뚜렷하게 조각되어있으며 비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로 지증대사적조탑비와 규모가 같은 것이 특징입니다
봉암사 정진대사탑비(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碑)는 보물 제172호로
봉암사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전기의 탑비로 봉암사를 중흥한
정진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탑입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 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머리 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이는데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 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을 썼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35호로 지정
되었다는 석종형 부도입니다
이 석종형 부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고 석종형 부도는 사각의
받침대 위에 종 모양의 탑신을 두고 머리장식을 하였습니다
현대의 봉암사중창주라고 하는 서암당의 승탑과 탑비가 최근에
세워진 듯 흰색으로 깨끗한 모습입니다
새로 세워진 서암당의 승탑비입니다
서암당의 승탑입니다
정진대사 원오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신라시대 이래의 기본형인
팔각 원당형을 따른 묘탑으로 전체의 구조는 지증대사 적조탑을
그대로 따랐으며 탑의 높이는 5m 지대석의 너비는 2.9m 입니다
봉암사 정진대사탑(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은 보물 제171호이며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중턱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경승지를
택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효공왕 원년(897)에 개초사에서 수도한 후
효공왕 3년(899)에 당에 다녀왔다가 경애왕 원년(924)에 귀속하여
백암사를 거쳐 봉암사에 와서 이 절을 크게 번영시켰다고 합니다
정진대사탑은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으며 탑신을 받치는 기단
곳곳에 꽃무늬조각과 구름·용·연꽃무늬 등의 불교 세계를 상징
하는 각종 장식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정진대사탑은 탑신의 높직한 8각 몸돌은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조각이 있고 앞쪽 면에 자물쇠 모양의 조각이 있을 뿐
다른 7면은 조각이 없습니다.
정진대사탑의 지붕돌은 지나치게 두꺼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만이 남아 있습니다.
정진대사탑은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탑으로 양식상 절 안에
남아있는 봉암사 지증대사탑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본구성과
비례감, 조각수법 등이 다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넓은 반석 측면에 야유암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봉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썼다는 야유암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만 봉암사 안쪽 마애불상
부근에도 백운대라는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 반석은 근래에 큰 돌을 움직여서 만들어 놓은 반석인 것 같은데
큰 돌을 어떻게 받침대를 세워서 시멘트로 고정을 하였을까 ?
임시 주차장으로 마련된 희양초등학교 교정인데 고우니는 경주에서
당일 새벽 3시경에 출발하여 희양초등학교에 도착하니 6시가
조금지났는데도 벌써 승용차가 몇대 주차해 놓고 있드군요
하산 할 때는 이 운동장에도 차들이 꽉 차있어서
회차를 하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공지사항
1. 산문개방 : 당일 오전 7시부터 ~ 오후 7시 까지
참배하실 수입니다. (7시까지 퇴장)
2. 참배범위 : 봉암사 경내(법당)만 참배가 가능하며,
산중 암자는 참배가 불가 합니다
3. 금지복장 : 등산복, 미니스커트, 반바지, 나시(민소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착용할 시 출입이 금지되오니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4. 교통안내 대중교통 - 점촌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가은 행
방면 버스를 이용하시면 봉암사 경비실 앞까지
버스가 도착합니다.
승 용 차 - 승용차는 일체 출입 금지되오니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본 사찰 입구에서 경찰이 차량통제함)
봉암사 입구(희양초등학교 운동장)에 임시주차장을
마련하였으나, 주차장이 협소한 관계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편이 유리합니다.
당일, 희양초등학교에서 본 사찰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할 예정입니다
(승용차는 일체 출입이 금지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5. 등산로 (출입금지) : 충북 괴산방면에서 희양산 정상을
경유하여 본 사찰(봉암사)로 하산할 경우 또는 본 사찰을
경유하여 희양산을 등산하는 것에 대하여 본 사찰관계자와
경찰이 검문소를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이점 유념하시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하여 시기 바랍니다
6.기타사항
- 희양산(봉암사)은 산림법에 의해 자연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희양산은 1년내내 등산이 금지 됩니다
- 봉암사 경내는 금연이며 휴지통이 없으므로 오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음식물(식사. 음료. 과일. 과자.
아이스크림 등)은 반입이 불가합니다
- 본 사찰 경내에서는 각종 상행위를 할 수 없으므로
잡상인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有人問我家風 (유인문아가풍) 내게 가풍을 묻는 사람 있으면
출처 고우니방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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