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눈이 내리고 있는 강진,
봄을 알렸던 여러 꽃들 중에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설레이게 했던 꽃은 무엇인가요?
오늘은 그 설레는 마음을 안고 당일여행을 할 수 있는 강진의 명소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무위사에서 시작해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입니다!
무위사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서기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가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백운동별서정원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영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다산선생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 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는데 이를 근거로 호남의 유서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재현하게 되었다.
백운동 계곡은 강진향토문화유산 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일컬으며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강진다원
월출산은 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월출산 기슭은 해마다 5월 초가 되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채색된다.
5월의 강진 다원은 취미로 다도를 즐기는 이들뿐 아니라 일반 나들이객들에게도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방문객들은 단지 관광이나 사진촬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차 향기에 취하며 녹찻잎을 따보는 이색체험을 할 수도 있다.
오감통
음악인들의 사랑방이자 놀이터인 음악창작소, 공연과 영화가 펼쳐지는 푸르른 잔디광장, 강진의 맛을 한 곳에 모은 먹거리장터,
백년 간 강진한정식의 전통을 이어온 한정식체험관 등이 마련되어있습니다.
강진오감통에는 몸을 들썩이는 화려한 공연, 눈과 입이 즐거운 산해진미, 특별한 재미가 넘치는 체험거리,
지친 일상을 달래는 힐링여행, 건강한 식탁을 만드는 친환경 로컬푸드가 있습니다.
강진시문학파기념관
'시문학파'는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했던 문학 동인회의 명칭입니다.
당시 참여했던 동인은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 정지용,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 수주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 보 등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입니다. 이들 9명의 동인이 1세기여 만에 시문학파기념관이란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국내에 여러 문학관들이 있지만, 이렇듯 특정 문인이 아닌 유파 전체를 한자리에 아우르는 예는
강진의 시문학파기념관이 전국 최초입니다.
시문학파기념관은 한국의 서정시를 이끈 시문학파 시인들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나아가 20세기 시문학의 산실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사계절 내내 시의 향기가 흐르는 시문학파기념관에서 한국 순수 서정시의 진수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영랑생가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백련사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600여권에 달하는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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