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심수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세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심수향 시집『중심』(시학,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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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의 시「중심」은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나는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세상에 나온 수십 편의 작품 가운데 이 시를 우수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심수향 시인이 갑년(甲年)의 나이에 첫 시집『중심』(시학,2009)을 펴냈다. 얼마나 기쁠까, 축하를 보낸다. 시의 화자는 11월 배추밭에서 배추를 묶어주다가 중심(中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중심이 바로 서야 배추도 사람도, 그 무엇도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중심을 넣어주는 일은 ‘살림’과 ‘생명’ 모심의 고귀한 손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대상에 대한 보살핌일 수도 있고, 사랑과 교육일 수도 있다. 힘 넘치는 11월 배추를 짚 띠로 묶으니 종 모양이나 부도처럼 금세 단단해진다. 그러자 배추는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다른 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위 시의 시상 전개는 절묘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늦가을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꽃과 다른 길을 가는 배추를 그려낸 심수향 시인에게 우리가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우리도 중심을 세우고, 상대에게 중심을 넣어주면서 좀 더 밝은 세상을 향해 걸어갈 일이다.
출처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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