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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경주 남산/정호승

by 매화연가 2013. 8. 20.

경주 남산

 

정호승

 

 

봄날에 맹인 노인들이

경주 남산을 오른다

죽기 전에

감실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남산에 올라

안으로 안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실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

땀이 흐른다

허리춤에 찬 면수건을 꺼내 목을 닦는다

산새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다가

며느리가 싸준 김밥을 나누어 먹는다

감실 부처님은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맹인 노인이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 하고는

캔사이다를 마실 뿐

다들 말이 없다

 

 

-정호승 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비평사,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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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아직 경주 남산의 감실 부처를 영접하지 못한 시인이 있을까? 정호승의「경주 남산」이라는 이 시를 읽고는 여러 시인들이 경주 남산으로, 또 그 품속에 있는 감실 부처의 품속으로 많이도 달려갔으리라. 그곳으로 달려간 시인들은 부처를 만났을까? 정호승 시인은 어느 봄날 경주 남산 동쪽 산비탈에 있는 부처골의 감실 부처를 찾아가 진짜 부처를 만났던 모양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세상의 밥상 위에 공양으로 턱 내놓았으니. 정호승 시인이 부처를 만났던 것은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노인들 덕분이었다. 맹인(盲人)이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는 게 거짓말이라 하지 마라. 몸으로 또 마음으로 보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감실 부처님은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은 이미 서로들 다 봤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염화미소(拈華微笑)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맹인 노인들, 그들이 인간적 고통의 극한까지 걸어간 부처, 예수의 몸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부처는 지금, 여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있음이니.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