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 /내가 좋아하는 시
상수리나무/이기철
매화연가
2013. 5. 10. 13:34
상수리나무
이기철
꽃 피우지 않고도 저렇게 즐거운 삶이 있다 돌 지난 상수리나무 잎새가 새끼 노루의 목덜미 같다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햇빛이 오면 금세 즐거워지는 나무들 나무들이 즐거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람이 오면 한 군데도 비워둔 데 없이 왁자히 수선 떠는 아이들 같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같다 오전이 펼쳐놓은 출렁거리는 광목 같다 일찍 여름을 길어낸 삶들은 장화처럼 푹푹 깊어져 손대지 않아도 마구 풀물이 들 것 같다 저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맛있는 것 먹고 떠난 동생 같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도 저 혼자 즐거운 삶이 여기 있다
-시집『가장 따뜻한 책』(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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